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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크 Apr 07. 2024

월급 인상

그런데 별로... 오히려 기분 나빠!

업무 대행 조건으로 6개월 간 월급을 올려 받기로 했다. 월급 인상이라니! 신이 나야 하는데 기분이 별로다. 심지어 선심 쓰듯 보통 월급은 3호봉이 최대인데 관장 권한으로 4호봉이나 올려준다고 하는데, 기분만 더러워졌다. 먹고 떨어지라는 거야 뭐야. 그런 거면 돈이나 팍팍 주던가. 고작 이 정도로 입막음을 하시겠다? 


문제직원의 초고속 승진을 보며, 인사팀에 더 강력하게 항의를 했다. 인사팀은 사원 주도하에도 승진 요청 서류를 제출할 수 있으니 그 방법을 택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객관적 정보를 제공하며 나의 분노를 잠재웠다. 나는 노조와 연락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사팀에게는 일단 알겠다고 하며 이메일을 마무리지었다. 노조는 내 경우 승진이 정당한 해결책이라고 했고, 한 달 전 인사팀도 편목업무가 현재 내 전체 업무의 50% 이상을 차지하면 승진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었다.  양쪽의 말을 다 들어봐도 해결책은 승진인 것 같았다.


그런데 관장은 예외였다. 관장은 승진이 아닌 한시적 업무 대행의 조건으로 월급 인상을 제시했다. 수년간 묵혀온 업무 분장 문제의 궁극적 해결책이 아닌 6개월짜리 임시 해결책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관장과 상사 모두에게 짜증이 났다. 누가 봐도 이 상황을 무마시키려는 관장의 꼼수였다. 업무 대행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만 봐도 그렇다. 관장은 목록 사서의 은퇴로 인한 업무 공백에 차질을 막기 위해서 혹시 업무를 대신할 수 있는지 내게 의견을 먼저 물었어야 했다. 관리자는 공석이 생길 것을 미리 알고, 그에 따라 업무 대행자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그 후에 직원들에게 은퇴, 이직, 연구년, 병가 등으로 생긴 공석 안내를 할 때, 업무 대행자에 대한 안내도 같이 한다. 업무 대행에 대한 논의도 없었고, 목록 사서가 은퇴한 지 한참 됐는데 뜬금없이 업무 대행??? 내 업무 분장을 공석과 엮는 관장의 창의적(?) 발상에 감탄했다. 목록 사서가 은퇴하지 않고 계속 재직 중이었다면 관장은 내 업무 분장 해결 요청에 어떤 변명을 했을지 궁금했다. 


임시방편이라고는 해도 어쨌든 직장인에게 월급 인상이 나쁜 조건은 아니었지만, 관장이 괘씸해서 흔쾌히 수락할 수 없었다. 상사도 업무 대행에 대한 정확한 지시가 없어서 나는 노조와의 연락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렇게 일이 흐지부지 되는가 싶었는데, 한 달쯤 지나 인사팀이 먼저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지난번 인사팀에서 제안했던 승진 서류를 해당부서에 제출했는지, 제출 날짜는 언제인지를 묻는 내용이었다. 그때 인사팀이 이 방법을 제시했을 때 고마운 한편, 인사팀이 참 형식적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인사팀이 나의 억울함과 분노에 실제로 공감한다기보다는, A 상황엔 a라는 답변을 준다는 매뉴얼대로 대응하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먼저 친절하게 팔로우업을 해오니 당황스러웠다. 


인사팀의 이메일이 당황스럽긴 해도 계속 좌절하고 있던 내게는 오히려 기회였다. 그래서 솔직하게 답변을 했다. "승진 서류는 제출 안 했다. 인사팀에 강력 항의를 했던 날, 상사에게도 동일한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는데 승진은 절대 안 된다는 답변을 받았다. 너무 억울해서 그 이후에도 몇 차례 더 승진을 요구했지만 매번 대답은 같았다. 아무리 사원이 주도해서 승진 서류를 제출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미 정답을 뻔히 아는 상황에 서류 제출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은 노조한테 도움을 요청 중이다." 


노사관계에 빠삭한 인사팀은 "노조" 얘기에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내게 여러 가지 옵션을 줬다. 옵션과 상관없이 어쨌든 승진 서류를 제출해도 되지만, 서로에게 덜 대립적인 방법이 일을 더 순조롭게 진행시킬 수 있다는 한마디도 덧붙였다.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노조와 함께 승진 서류를 준비하고 있긴 했지만 제출은 최후의 수단일 뿐, 그전에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업무 분장이 잘 해결된다면 정말 기쁠 것 같았다. 인사팀의 옵션 중 하나는 내가 승진 서류 초안을 작성하면, 그 내용을 직접 관장과 얘기해 보겠다는 것이었는데 이 방법을 택했다. 


인사팀을 통해 이 내용을 전달받은 상사는 마치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듯 매우 언짢아하며 결재라인에 맞는 의사소통을 강조했다. 나는 여러 차례 공식 채널을 통해 시기적절하게 의사소통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해결책을 강구하지 않은 건 상사와 관장이었다. 오죽 그랬으면 인사팀이 중간에서 나섰을까. 내가 도대체 어떤 의사소통 채널을 어긴 건지, 상사는 왜 기분이 나쁜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인사팀을 통해 상사가 내 승진 서류를 받았으니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다시 한번 승진을 어필해보자 싶었다. 


지난 몇 년간의 내 월별 도서 편목 통계를 첨부하고 도서관 내 한국팀 업무량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돌아오는 답변은 여전히 똑같았다. 관장과 논의한 결과, 현시점에서는 승진은 불가능하며 대신 업무 대행을 하라고 했다. 자세한 이유를 듣고 싶으면 관장에게 직접 연락하라고 했다. 매번 관장의 말만 앵무새처럼 옮기며 중간관리자로서의 역할은 전혀 안 하는 상사가 지긋지긋했다.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듣기 위해 관장에게 직접 연락을 해 업무량을 제외한 다른 이유를 알려달라고 했다. 관장은 무엇보다도 내 포지션은 Technical Services (TS)를 서포트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편목업무만 담당하는 자리로 바꿀 수는 없다고 했다. 또한 승진시킬 만큼 충분한 편목 업무가 없는 반면 TS업무는 너무 많다고 했다. 이게 말인지 방귀인지. 내 근속기간과 월별 통계가 업무량을 증명하는데 내 이메일을 읽기는 했나 싶었다. 게다가 편목 업무는 내 업무 중 하나였고, TS의 중요 업무로 한 포지션이 편목 업무만 담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TS 업무가 그렇게 많으면 진작 내게 다른 업무를 배정해서 업무 분장을 해결했으면 됐을 텐데 왜 여태 질질 끌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다년간의 경력으로는 도저히 편목업무를 제외하고 그 많다는 TS 업무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관장이 생각하는 TS 업무가 뭔지 물어봤더니, TS 일은 상사와 상의해서 조정하라는 책임 회피성 대답뿐이었다. 매 답장마다 이상한 변명을 늘어놓는 관장에게 기어코 타당한 이유를 듣고자, 이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이메일을 주고받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관장이 늘어놓은 수많은 이유 중 납득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12월 1일 자로 공식적으로 업무 대행을 하기로 했는데, 상의했던 날짜와 다르게 목록 사서 선생님이 은퇴한 날을 콕 짚어 9월부터 소급적용해 월급을 인상해 준다고 했다. 12월로 다 상의됐는데 왜 갑자기 9월이냐고 이의제기를 했지만, 그동안 일을 해왔으니 괜찮다며 9월로 소급적용 해준다고 했다. 일단 준다니 받긴 했지만, 많이 떨떠름했다. 12월로 하자는 내 의견을 무시하는 여전한 태도에도 기분이 나빴고, 이 돈 받고 앞으로 더 이상 업무분장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 마!라는 입막음용 월급 인상처럼 느껴져서 재수 없었다. 


인사팀의 조언처럼 대립 없이 갈등 해결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관장과 말이 통하지 않아 완전한 대립 모드로 노조에 희망을 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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