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다니는 회사에 지원했을 때, 채용 면접 일정을 잡는 과정에서 문화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한국은 보통 채용공고에 서류전형 일정, 면접 날짜, 최종 합격자 발표일 등 채용 일정이 이미 정해져 있지만 미국은 조금 달랐다. 채용공고에 서류 접수 마감일만 적혀 있었다. 당시 나는 미국 내 워크 퍼밋 (Work Permit)이 없던 상황이라 서류 접수 마지막날 전까지 워크 퍼밋이 나올 수 있을까? 에 온 정신을 쏟고 있어서 사실 한국과 미국의 채용공고가 어떻게 다른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서류 마감 일주일을 앞두고 극적으로 워크퍼밋이 나왔고 서류 접수를 잘 마쳤다. 지원 마감 날짜만 있었을 뿐, 다음 단계와 절차에 대한 안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서류 접수 후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뭐, 한국에서도 면접날짜를 알아도 마냥 기다리는 건 마찬가지긴 하지만.) 그나마 회사 채용포털사이트에서 지원 완료, 해당 부서로 이력서 전달, 불합격 등으로 지원 내용에 대한 업데이트를 볼 수 있었는데,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새로고침을 했었다.
포털사이트에 서류 검토를 끝내고 해당 부서로 이력서를 전달했다는 업데이트가 뜨고 얼마 후 인사팀에게 메일을 받았다. 서류 전형에 합격을 했고 (야호!), 해당 부서에서 나와 면접을 진행하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었다. 전형적인 서류 합격 안내문처럼 보이지만, 그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나에겐 꽤나 문화충격이었다. 면접은 총 75분간 진행되며, 아래 제시된 날짜와 시간 중 내가 가능한 날 2개를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75분이요??? 면접을요??? 인적성 검사 아니고요??? (혹시 35, 25, 뭐가 됐든 7로 오타를 낸 건 아닌가요, 담당자님?) 내가 본 한국 채용면접은 여태 20분을 넘긴 적이 없었다. (그래서 불합격한 거 아니고, 그래도 다 붙었습니다!!) 한국어로 면접을 본다고 해도 75분은 꽤나 긴 시간이라고 생각되는데, 심지어 영어로 한 시간 넘게 면접을 볼 생각을 하니 시작도 전에 아찔했다. 시간에 놀라긴 했지만, 문화 충격을 받은 건 면접 시간이 아니라, 나보고 날짜를 고르라며 면접 일정에 대해 선택권을 준 부분이었다. 면접자의 시간도 존중하고 배려해 주는 건가? 면접 날짜를 내가 고를 수 있다니, 참 민주적이라고 생각했다. 영어면접을 조금이라도 더 준비하고 싶었던 나는 고민 없이 가장 늦은 날짜를 골라 답변을 보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역시 다르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안타깝게도 실제 회사 생활은 그렇지 못했다. 업무 분장 해결을 위해 노조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중국인 상사에게 전달하고 얼마 후에 있었던 일이다. 상사에게 노조 얘기를 꺼내기 몇 주 전, 상사는 나에게 업무분장 수정안을 주며 몇 주 뒤에 같이 검토해 보자고 한 상황이었다. 내가 속한 팀의 업무가 너~~ 무 많기 때문에 업무 변경과 승진은 절대 안 된다던 그들 (앞 에피소드 참조)의 수정안은 새로운 업무의 추가 없이 문제가 됐던 업무만 삭제되어 사실 검토할 내용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쨌든 상사에게 수정안은 검토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노조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업무분장을 새롭게 작성하고 싶다는 의견을 분명히 밝혔고, 상사는 내 의견을 중국인 관장에게 전달했다.
물론! 상사가 전달한 이메일에 이번에도 관장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 (한결같은 사람 ^^) 관장이 대답하든 말든 난 어쨌든 노조와 함께 승진 서류를 제출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관장의 대답은 중요치 않았다. 한 달 후에 나는 노조와 함께 최종 서류를 준비해서 상사에게 제출하며, 잘 살펴보고 검토란에 서명 후 유관 부서로 잘 전달해 줄 것을 당부했다. 내 이메일을 받은 상사는 관장을 참조하며 검토 후 알려준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갑자기 관장이 내가 제출한 서류와 관련해 일방적으로 미팅을 잡아 통보했다. 아웃룩에 본인의 스케줄을 업데이트해 놓고, 언제 내가 시간이 가능한지 확인할 수 있도록 해놓는 게 미국의 문화이긴 했지만, 이건 사정이 달랐다.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 "좀 더 논의하고 싶은데 언제가 시간 괜찮니?" 정도는 물어보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기에 관장의 일방적인 태도에 기분이 나빴다. 그런데다가 미팅에 대한 설명도, 아무런 맥락도 없이 다짜고짜 최근 제출한 서류 관련 미팅을 위해 날짜를 비워두고, 참고로 인사팀도 미팅에 참여할 것이라는 얘기뿐이라 이게 도대체 뭐 하자는 건가 싶었다.
노조 개입에 대한 얘기를 꺼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당시에 업무 분장으로 여러 차례 상사와 관장과 이메일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노조와 내가 함께 제시한 해결안인 "승진 요청" 자체는 새롭지 않았다. 승진 요청이라고 쓰긴 했지만, 내가 제출한 서류의 본래 목적은 내 포지션에서 수행하는 업무에 대해 나의 입장과 관장의 견해가 다르니 상위 기관에서 객관적 기준에 따라 검토를 하고, 판단을 내려 가장 적합한 포지션으로 재배치 (나의 경우는 승진)를 하는 것이다. 내가 업무 분장을 분명히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승진 요청을 했을 때, 그리고 노조와 협의 중이라는 의사를 밝혔을 때 등 오히려 미팅이 필요했던 순간은 많았다. 그러나 노조의 방식에 따라 서류를 제출하며 절차대로 진행해 달라고 내 의사를 분명히 밝힌 상황에서 관장의 미팅 통보는 매우 쓸데없게 느껴졌다.
'미팅 같은 소리 하네. 난 참석하지 않을 테니 빨리 읽고 싸인이나 해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똑같이 예의 없는 사람이 되기는 싫었다. 평정심을 되찾고 "관장님, 미팅의 목적이 무엇인가요? 그리고 노조 대표 없이 저 혼자 미팅에 참석하는 건 어렵겠습니다."라고 답변을 보냈다. 관장이 아닌 인사담당자가 대신 내 질문에 간략한 답변을 해줬고, 원하면 노조 대표를 포함해 스케줄을 재조정하라고 덧붙여줬다.
결국 관장, 상사, 나, 노조 대표, 인사담당자 총 5명이 미팅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미팅이 가관이었다. 서류 제출과 관련해 상사는 모든 걸 내 탓을 하기 시작했다. 이마크가 본인 업무 내용을 보고한 적이 없어 자신은 이마크가 그동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몰랐고, 그래서 서류 내용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의 무능력함을 뽐내는 건가? 이게 도대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지?? 팀원들의 업무 내용과 진행 상황 등을 관리/감독하라고 있는 자리일 뿐만 아니라 내게 업무 분장의 상당 부분을 하지 말라고 지시를 해놓고 이 상황을 몰랐다니?? 나는 침착하게 상사의 말에 반박을 했고, 팀 내 업무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내가 얼마나 잘해왔는지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데 관장의 반응이 기가 막혔다. 웃는 얼굴로 내 업무 역량을 비난하며, 목록 업무를 해낼 자신 없으면 지금이라도 그만해도 괜찮다고 했다. 자신 없으면 해당 업무는 외주를 주는 방법도 있으니 솔직히 말하라고 했다. ('관장놈, 참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데 재주가 있네?') 어처구니가 없었다. 목록 업무에 대한 내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해당 업무를 검토해 주셨던 목록 사서선생님도 내 결과물에 매우 만족해하셨었다. 그런데 목록 업무와는 거리가 먼 관장에게 이런 소리를 듣고 있자니, 너무 불쾌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표정 관리하며 의견 잘 들었고, 어쨌든 나는 서류 제출을 철회할 생각이 없으니 기한 내에 상위기관으로 넘겨달라는 얘기를 남기고 미팅을 끝냈다.
미팅이 끝나고 노조 대표에게 전화가 왔다. 나에게 책임을 돌리는 상사, 나를 비난하던 관장 사이에 있던 나의 기분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나는 사실 기분은 매우 나빴지만, 늘 그런 자세와 태도였기 때문에 나로서는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노조 대표가 보기에는 엄청난 적신호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이건 노사협약서에서 명시된 직장 내 행동지침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했다. 조직 내 상호 존중과 전문성을 조성할 수 있도록 서로 정중한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상사와 관장은 이에 완전히 어긋났다고 했다. 노조 대표는 이미 미팅을 참석했던 인사팀에 경고를 주었고, 인사팀도 그들의 잘못된 태도를 인정하는 바 관리자 교육을 잘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나에게 얘기해 주었다. 또한, 앞으로도 상사나 관장이 나를 이런 태도로 대하면 즉시 노조에 보고를 해달라고 했다.
너무 통쾌했다! 때론 내가 너무 '예의'에 민감한가 싶을 때도 많았는데, 노조 대표가 제삼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내가 불쾌한 포인트를 정확히 캐치해 주니 속이 다 시원했다. 인사팀에 나를 향한 관장의 부당 대우를 아무리 보고해도 나의 억울함이 100% 온전히 전달되지는 않았었는데, 인사팀과 노조 앞에서 직원을 비난하는 모습을 생중계로 보여주다니! 이 미팅을 잡은 관장이 오히려 고맙게 느껴졌다.
이렇듯 상사와 관장이 모두 중국인이다 보니, 마치 중국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 때가 자주 있었다. 미국 노조에게 도움을 구하는 과정에서 보니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었는지 더 이해가 됐다. 하지만 더 분명하게 느낀 건 내가 미국 회사에서 너무 한국식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