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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Mar 05. 2024

신채호 <조선상고사>

제4장 사료 수집과 선택

나에게는 귀로 들을 인연만 있었고 눈으로 볼 기회는 없었다. 한번 네댓 친구와 동행하여 압록강 위 집안현 곧 고구려 제2환도성을 얼핏 보았음이 나의 인생에 기념할 만한 장관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여비가 모자라서 능묘가 모두 몇인지 세어 볼 여가도 없이, 능으로 인정할 것이 수백이요, 묘가 1만 내외라는 근거 없는 판단을 하엿을 뿐이었다. (중량) 수천 원 또는 수만 원이면 능 하나를 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수천 년 전 고구려 생활의 생생한 사진을 볼 수 있을 것인데 하는 꿈 같은 생각만 하였다. 

(중략)

하루 동안 그 겉모습만 어설프게 관찰했지만, 고구려의 종교·예술·경제력 등이 어떠했는지가 눈앞에 살아 나타나서, 그 자리에서 집안현을 한 번 보는 것이 김부식의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는 단안을 내렸다. (중략)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우리 가난한 서생 손으로는 도저히 성취하지 못할 사료임을 스스로 깨달았다.

(중략)

<고려사> <최영전>에 따르면 최영이 당나라가 30만 군사로 고구려를 침범하여, 고구려는 승군 3만을 내어 이를 대파하였다.라고 말하였으나, <삼국사기>50권 가운데 어느 곳에서도 이 사실이 보이지 않는다. (중략) <고려사> 덕분에 <삼국사>에 빠진 승군을 알게 되고, <고려도경>덕분에 <고려사>에 상세하지 않은 승군의 성질을 알게 되고, <통전>,<신당서><후주서>와 신라 고사 덕분에 승군과 선인과 재가 화상이 같은 단체의 무리임을 알게되었다. (중략) 몇십 자약사(요약된 글)를 6,7가지 서적 수십 권을 뒤진 결과 비로소 알아낸 것이다.

(중략)

만일 사실의 진위를 묻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버렸다가는, 역사상 위증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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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선생은 만주와 연해주를 돌아다니며 만난 우리의 유물과 유적을 제대로 연구하지 못하는 현실을 한탄했습니다. 독립하기에도 모든 것이 역부족인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지금에도 안타깝게 느껴지기만 합니다. 신채호 선생님은 책을 보는 것보다 직접 현장에서 마주하는 것이 중요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역사여행 책을 낸 저로서도 이 부분에 깊이 공감합니다. 직접 보고 느끼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속 빈 강정과 같다는 느낌을 자주 갖습니다. 직접 현장에 갔을 때 비로서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숨결을 느낄 수 있거든요.     


또한 한 문장의 진실을 찾기 위해 수많은 원서를 읽고 찾아내려는 신채호 선생의 노력과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느끼게 합니다. 독립운동하면서 이런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한지 당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물론 빈약했던 역사지식 등 모든 것이 부족했기에 신채호 선생님의 주장이 지금은 오류로 판명된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오늘날 신채호 선생이 풍부해진 자료를 가지고 역사를 정립했다면,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지 기대가 됩니다. 동시에 그러지 못했던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한국의 정체성을 없애려 한 일제에 맞서 한국인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지키려했던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이 3월에 더 기억되는 것은 저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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