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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ul 30. 2024

억울함이 전설을 만들다.

대중교통은 아무래도 차를 운전하는 것보다는 여러모로 불편함이 있다. 하지만, 대중교통이 주는 매력도 만만치 않다. 운전하지 않고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며, 아무 생각하지 않거나 여러 상상의 나래를 펴며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큰 장점이 있다. 특히 최근에는 지역을 소개하는 투어버스를 운영하는 지자체들이 많아지면서, 운영 프로그램도 예전에 비해 다채로워지고 있다. 그렇기에 때로는 차를 두고 시티투어버스를 이용한 여행을 즐기기도 한다. 

광주를 방문했을 때 시티투어버스를 타고 무등산의 충장사와 국립5·18민주묘지를 방문했다.  5·18민주묘지는 너무도 잘 알려져 많은 사람이 방문하지만, 충장사는 광주와 호남지역에 사는 분이 아닌 외지인에게는 낯선 장소일 수 있다. 충장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웠지만,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돌아가신 김덕령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또한 김덕령과 그의 가족묘가 조성된 장소이기도 하다. 

김덕령은 다소 낯선 인물로 다가올 수도 있지만, 광주 시민에게는 매우 익숙하고 자랑스러운 인물이다. 한 예로 김덕령이 태어난 충효리는 국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지명이고, 5·18 민주항쟁이 벌어졌던 충장로는 김덕령의 호에서 나온 거리다. 이처럼 광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김덕령은 어떤 인물인가? 


1567년 광주에서 태어나 김덕령은 성혼에게 공부를 배웠다. 그러나 배움을 세상에 펼칠 기회도 없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25살의 청년 김덕령은 형과 의병을 일으켜 전주로 향했다. 그러나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형의 뜻에 따라 고향으로 내려가 장례를 치른다. 하지만, 전라도 관찰사 이정암을 비롯한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의 권유로 김덕령은 의병을 다시 일으킨다. 이 소식에 선조는 김덕령에게 형조좌랑의 직함과 충용장의 군호를 내려 독려하였다. 


이후 김덕령은 권율의 막하에서 영남 서부 지역의 방어를 위해 진해와 고성에 주둔하였다. 하지만, 명과 일본이 조선을 배제한 채 강화협상을 벌이면서 전투를 벌일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군대 지휘권을 가진 명나라가 일체의 전투를 막은 채 강화협상을 진행하면서 병사들의 불만은 높아지자, 김덕령은 군기를 바로잡고자 더욱더 강하게 군법을 엄하게 하였다. 그 과정에서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비를 죽인 일로 투옥되고 만다. 다행히 영남 유생과 정탁의 변호로 곧 석방되었지만, 윤근수의 미움을 받게 된다. 결국 1596년 윤근수에 의해 이몽학의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죄명으로 20여 일 동안 6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죽는다. 이때 김덕령의 나이는 불과 29살에 불과했다. 다행히 1661년 현종 때 김덕령의 억울함이 풀리면서 서원에 배향된다.


정리하면 김덕령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별다른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많은 이들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몽학의 난과 연루되어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훗날 조선 정부는 잘못을 인정하고 서원에 배향했다. 여기서 김덕령이 신원 회복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선조는 조선시대 가장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국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평가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백성을 버리고 비 오는 밤에 야반도주하고, 명나라에 자신만의 망명이라도 받아달라고 요청하였다. 뛰어난 명장을 시기 질투하여 죽이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임진왜란이 승리한 원인을 조선이 아닌 명나라의 도움에서 찾았다. 선조의 이런 모습을 비판하고 제재해야 할 관료들은 국왕의 비위를 맞추려는 노력을 기울이거나 침묵하였다. 백성들은 어디에도 답답한 마음을 호소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억울하게 죽은 장수의 전설을 만들어 무능한 선조와 관료들을 비난했다. 그중에 호남을 대표적인 인물이 김덕령이다.


호남지역의 백성들은 우선 뛰어난 능력을 갖춘 김덕령을 활용하지 못한 조정을 비난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이항복이 김덕령을 소개하는 글을 보면 “담양의 금성산성에 불끈 솟은 바위는 사람이 도저히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김덕령은 그 바위를 걸어서 넘어 다니는 것을 20명이 넘는 사람이 보았습니다.”라고 하여 김덕령의 비범함이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김덕령의 할아버지가 무당산에서 발견한 명당에 모친을 모셔서 김덕령이라는 큰 인물이 나왔다는 전설, 김덕령이 무등산의 수십 길이나 되는 바위를 훌쩍 넘었다는 널바위 전설, 말을 타고 화살보다 빨리 달렸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또한 무기를 만들었다는 주검동을 비롯하여 치마바위, 깨진 바위, 문바위, 용바위 등 여러 지명이 김덕령과 연관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최고봉은 김덕령 겨드랑이 아래에 날개가 있다는 내용이다. 민간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겨드랑이 아래에 날개가 있으면 나라를 뒤집을 인물이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왔다. 그래서 날개를 숨기다가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들이 혼란할 때마다 등장하곤 했다. 그런데 유성룡이 “일본군이 김덕령을 날아다니는 장수라고 하고 있습니다. 죄가 많지만, 우선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말하자, 선조는 “사람의 겨드랑이 아래에 어찌 날개가 있겠는가?”라는 대목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이것은 선조가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 임진왜란을 끝낼 수 있는 김덕령을 죽였다고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김덕령의 죽음과 관련한 전설은 특별함을 넘어 백성 스스로 세상을 바꿀 의지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이야기다. 조선 정부는 이몽학의 난에 연루된 김덕령을 체포하고 싶었지만, 너무도 신출귀몰해서 도저히 잡을 수 없었다. 그럴수록 김덕령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일본의 침략으로 힘들어하는 백성들이 자신으로 인하여 이중삼중으로 고생할까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역적으로 죽기는 너무도 억울했다. 그래서 <만고충신 김덕령>이라는 비석을 세워주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말한다. 김덕령이 제시한 방법 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던 조선 정부는 <만고충신 김덕령> 비석을 세워주자, 김덕령은 스스로 관아를 찾아와 자수하였다. 그리고는 자기 겨드랑이 밑에 난 비늘을 벗겨내고 갈대송곳으로 찌르면 죽는다는 비밀을 털어놓는다. 조선 정부는 김덕령을 죽인 후 비석에 새겨진 비문을 지우려고 했지만, 오히려 <만고충신 김덕령>은 더욱 진하게 보여 포기하고 만다. 


김덕령과 관련한 여러 전설은 조선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회질서이자 규범이던 충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만약 오늘날이라면 이런 맺음의 전설이 만들어졌을까? 아마도 시민의 힘으로 독재자와 국민을 기만한 대통령을 여러 번 내쫓은 경험을 가진 지금은 전혀 다른 결론을 가진 전설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결론이든 대한민국 국민이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리 선조들은 선조와 관료들의 무능함과 옹졸함을 전설로 꾸짖었다. 한두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모두의 입으로 세대를 거쳐 누가 역사의 죄인인지를 알렸다. 결국 민심이 하늘이라는 말을 아는 현종은 백성의 뜻에 따라 선조의 잘못을 인정하고 김덕령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래서일까? 광주 시티투어버스의 운행코스가 나에게 의미 있게 다가왔다. 충장사를 거쳐 국립5·18민주묘지로 가는 길이 단순한 도로가 아닌 시대와 시대를 연결하는 길처럼 느껴졌다. 김덕령의 억울함을 수백 년 전의 백성이 풀어주었고, 5·18 민주항쟁의 진실도 국민이 해결했다는 점에서 역사의 위대함이 느껴진다. 더불어 한국인으로서 자긍심도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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