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퍼런스 없이 혁신을 만들 수 있을까
[0. 프롤로그]
많은 직장인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인생의 답은 회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하지만 앎과 행함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따라서 어떤 이는 너무 몸이 무거워질 때까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는다. 결국 사축(社畜, 회사의 가축)이 되어 나이가 들 때까지 제발 회사가 나를 버리지 말기를 기도하며 눈물 그렁한 눈망울을 가진 소처럼 일하기도 한다. 반면 누군가는 약간의 조직 경험만으로도 뼈저리게 깨닫는다. 그리고 다른 방도를 끊임없이 찾아 나선다. 극소수의 사람들은 회사에 취업하기 전부터 찾기도 한다. 투자이든 사업이든 부업이든, 온전한 나만의 것을.
나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나 스스로 뭔가를 일구어 나가는 법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로 선택한 학과였다. 경영학을 통해 배운 핵심적인 깨달음은 학문적 측면보다 그 과정에서의 수많은 협업과 치열한 경쟁 속, 결국 세상의 모든 큰 일은 나 혼자서가 아닌 '사람들'이 이룬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다들 여럿이 힘을 모을 수 있는 회사를 세우는 것이리라. 하지만 다른 사람이 만든 조직, 일명 취업을 해서는 내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역량에 편차가 너무 심했다. 그리고 결국 회사가 오래되고 커져 대기업이 될수록, 그 구성원 각자가 서로 다른 이해관계 속에서 제 밥그릇을 챙기는데 치중하거나, 필요한 일을 하지 않고 일하는 척 요식행위에만 몰두하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에도 조직생활을 했던 이들이 이러한 종류의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수많은 스타트업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빈 손에서 회사를 만드는 것은, 안락한 회사 회의실에서 새롭고 괜찮아 보이는 아이디어를 내는 것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내가 사업을 지속하며 잊지 않고자 하는 포인트는 우선적으로 다음과 같다. 실력, 사람, 환경.
첫째, 나 스스로의 실력을 키우고, 함께 하는 이들의 실력을 끊임없이 키워 결과물의 기복을 줄이기(운동선수들이 늘 피나는 연습을 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둘째, 실력은 결코 회사의 강압으로 키워지지 않으니, 스스로 성장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을 곁에 두거나 채용하기. 셋째, 나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자만하지 않기. 변화하는 환경을 끊임없이 날카롭게 살펴, 이를 최대한 순풍으로 등지고 앞으로 나아가기.
다시는 이전 사고방식으로 돌아올 수 없는, 스틱스 강*을 건너 창업을 향하는 여정을 기록하고자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저승의 강
[1. 여정의 시작]
과거 광고회사에서 기획자로 지내다 보니 나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설득하는 훈련을 하게 됐다. 그리고 현재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다 보니 데이터 기반의 합리적인 BM(Business Model)을 설계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실현시킬 Framework을 구조화하는 역량을 키우게 되었다. 나의 역량이 갖춰진 상황에 가장 친한 친구가 개발자로 전직을 했다. 친구는 전형적인 너드로 자신이 흥미가 생긴 연구주제는 밤을 새워서라도 독파하곤 한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만날 때마다 그는 나의 잊힌 열정을 자극했고, 나는 그에게 스스로의 사업을 해야만 하는 이유와 방법을 전파했다.
어느 날 개발자 친구가 나에게 제안했다. 함께 사업계획서를 제출해보지 않겠냐고.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진행하는 예창패(예비창업패키지)에. 살펴보니 아직 사업자 등록을 하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업성을 따져 최대 1억 원까지 창업 지원금을 주는 제도였다. 늘 국가에 엄청난 근로소득세와 증권거래세를 뜯기던 차에 국가에서 받을 수 있는 돈이라니? 한번 해 보자 싶었다. 그리고 여기서 광고회사를 다녔던 병이 도졌다. 과거 다른 사람들이 썼던 사업계획서를 보지 않고 작업하겠다는 오기가 생긴 것이다. 결국 앞부분의 사업기획은 내가 주도했어야 했기에 친구에게 의견을 말했고, 그는 흔쾌히 나를 믿어주었다.
회사를 다니며 주말마다 틈틈이 회의를 하며 아이템을 선정, 아이디어와 BM을 발전시켜 갔다. 하지만 물리적인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주중에는 회사 프로젝트로 야근을 하고, 주말에는 사업을 위한 작업을 하니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10주간의 컨설팅 프로젝트를 마감하고 겨우 쓰게 된 휴가를 온통 사업계획서 작성에 쏟아부었다. 패기롭게 시작했으나 살필수록 계속 빈틈이 보이고, 이를 메꾸기 위해 새로운 자료조사와 아이디어를 쥐어짰다. 개발자 친구는 아이디어는 참 구체적이고 좋았지만, 결국 시각화하고 문서화하는 것은 오롯이 내가 짊어져야 할 몫이었다. 제출 마지막주는 친구의 자취방에서 쪽잠을 자며 작업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나 스스로의 것을 기획하고 계획하니 몸은 괴롭지만 정신적인 희열이 엄청났다. 회사에서는 그렇게도 괴롭고 억울했던 야근을 불사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반가웠다. 과거 책임은 없고 자유만 있던 대학 시절 스스로 즐거워 참여했던 공모전들과 사업 구상을 하러 작은 단칸방에 모여 앉아 꿈을 꾸던 과거의 나로 돌아간 듯했다. 그리고 얼마 후 한 통의 문자와 메일을 받게 된다.
제출하던 순간까지도 친구에게 큰소리쳤었지만, 다른 참고사항 없이 내 뜻을 주장하는 것이 과연 효과적일지 마음 한편에 불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분명 평가하는 심사위원들은 수많은 엇비슷한 사업계획서에 지쳤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내가 광고회사를 다니며 학생들의 공모전을 평가할 때 느꼈던 피로감에 의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도전이었다. 이에 어디서도 보지 못한 사업계획서를 논리적으로 쓰자는 전략을 세웠고, 다행히 오매불망 결과를 기다리던 개발자 친구에게 부끄럽지 않은 결과를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런데 2차로 발표 평가가 있는 줄은 몰랐다. 하지만 우리의 사업과 의지를 상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자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한 발짝 더 창업의 세계에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