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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파파 Jun 08. 2024

016 떨림과 울림(김상욱 저)


과학의 가치중립성


몇 해 전 알쓸신잡이라는 예능에서 저자인 김상욱 교수를 처음 보았다. 물리학자이지만 인간사회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인문학에 까지 넘치는 사랑과 지식을 가진 모습에 매료되어 그의 저서를 찾아 읽어 보았다. 또 다른 저서 '김상욱의 과학공부'에 이어 두 번째 읽은 책이다.


책의 시작은 우주의 시작인 빅뱅으로부터 한다. 우주가 138억 년 전 한 점의 폭발에서 시작했다는 빅뱅이론은 접할 때마다 사색의 난관에 봉착한다. 그럼 그 한 점의 폭발 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이러한 질문에 저명한 물리학자인 저자는 한 단어로 답한다. '모른다'라고. 적색 편이현상, 우주 배경 복사 등 빅뱅이론을 뒷받침하는 물리적으로 확실한 증거는 있으나, 그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전문가의 이러한 대답이 성의 없고 실망스럽다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모르는 것 모른다고 하는 것이야 말로 과학자의 필수적인 덕목이라 한다. 순간의 모면을 위해 거짓 지식이 전파되는 순간 과학과 지성의 세계는 오염되기 때문일 것이다.


혹 가끔 거짓을 일삼는 비정상적인 과학자가 나타난다 해도 황우석 사태와 같이 과학계의 자정작용으로 잘못된 지식이 전파되는 일은 원천 차단된다고 한다. 이러한 가치중립적인 면모는 거짓과 비방이 들끓는 정치사회와 사뭇 비교된다.


양자역학의 발전 과정이 보여주는 과학계의 중립성


어벤저스 엔드게임 관람 후 양자역학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이에 양자역학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었는데 읽을수록 30년 넘게 살아오며 쌓아온 나의 직관이 붕괴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저명한 물리학자인 리처드 파인만이 '양자역학을 이해한 사람은 없다'라고 단언할 정도이니 그 난해함도 담담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중슬릿 실험으로 난관에 부딪힌 과학자들은 코펜하겐에 모여 이를 토론하기 시작한다. 닐스 보어를 비롯한 젊은 과학자들의 관측하기 전까지는 위치를 알 수 없다는 미시세계의 특징에 대한 설명을, 아인슈타인과 같은 기존 과학자들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다소 격양된 아인슈타인이 창밖의 달을 가리키며 '저 달 또한 관측하기 전까지는 그 위치를 알 수 없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에 닐스 보어는 그렇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아인슈타인의 분노가 이해된다. 도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아인슈타인의 분노에 찬 각종 질문에도 닐스보어, 하이젠베르트크, 폰 노이만은 답을 한다. 바로 양자역학의 시초가 되는 코펜하겐 해석이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고자 한 것은 양자역학의 난해함이 아니다. 기존 물리학 체계를 뒤엎는 양자역학이지만 이러한 기존 세력의 반발에 밀려나지 않고 당당히 주장한 그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과학의 중립성이다.


언뜻 보면 기존의 물리 체계로 말도 안 되지만 실제 전자를 가지고 한 이중 슬릿 실험에서 그러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는가? 과학은 통념이나 다수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입증된 사실을 가지고 이론을 세우는 것이다.


과학사에 이름을 남기는 큰 변곡점들이 있다. 지동설, 상대성이론, 빅뱅이론, 진화설, 양자역학 등이다. 이들의 특징은 과학의 한 단계 도약을 이끌어 냈다는 점도 있지만, 모두 엄청난 반항과 핍박을 이겨내고 당대의 통념을 깨며 등장한 이론이라는 것이다.


빅뱅이론처럼 비아냥을 듣는 수준에서부터 지동설 같이 자신의 주장에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순간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들 모두 자신들이 밝혀낸 옳은 지식의 관철을 위해 노력했다.


그들이 지키고자 한 것은 본인의 신념과 명예가 아니다. 과학의 중립성이다. 빅뱅이전의 세계에 대해 모른다고 하는 과학자들은 무능해서가 아니다. 현재의 과학 수준으로는 도저히 당시의 상황을 가정, 추론할 수 없기에 어떠한 오해의 여지도 남기지 않기 위해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이 또한 과학의 중립성이다.


중립의 길을 걷는 과학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인간의 역할  


철저히 중립적인 과학도 인간사회에 들어서면서 특정 가치를 띄게 된다. 가치중립성이라는 알을 깨고 아프락사스에게 날아가는 과학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인간의 역할이다.


* 아프락사스 : 소설 데미안에 등장하는 선과 악이 혼재한 신의 이름


노벨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는 광산채굴에 엄청난 편의성을 주었지만 그 파괴력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핵융합은 엄청난 에너지를 제공하는 문명의 이기이지만, 같은 물리적 현상이 적용되는 핵폭탄은 인류의 절멸을 초래할 수 있는 재앙의 씨앗이다. 총이란 것은 경찰 손에 있으면 시민을 지켜주지만 강도의 손에 들려 있으면 시민을 해한다. 총을 사용하는 사람의 의지가 그 총의 용처를 결정한다.


재미있게 봤던 웹툰 테러맨에는 아래와 같은 대사가 등장한다.


철학이 없는 과학은 이정표 없는 길바닥이여!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너처럼 헛짓거리를 하는 놈들이 넘쳐난다고!  


즉 과학의 올바른 사용을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심도 깊은 숙고와 박애주의를 등에 업은 철학적 사유가 필요하다.


'문송'한 사회, 그러나 어느 때보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문송합니다'라는 자조 섞인 표현이 만연한 지금의 인문학적 위기의 시대가 우려스럽다. 인문학의 경시가 비인간적이고 반인류애적 사회를 초래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 문송합니다 : 이공계 선호현상에 의해 문과생들의 취업이 어려워지자 등장한 자조 섞인 표현으로 문과라 죄송합니다의 줄임말이다.


오바마 정부의 이공계 지원책인 STEM을 필두로 전 세계적인 이공계 선호 현상에 인류는 엄청난 기술의 발전을 경험했지만, 정작 지금의 세계는 신냉전과 탈세계화라는 분열의 조짐을 겪고 있다.


한 세기 전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그의 저서 '노예의 길'에서 인문학의 경시를 경고했다.


교육체계 대부분을 철저하게 인문분야로부터 실용분야로 전반적으로 전환시킬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1840년과 1940년 사이의 독일의 경우보다 더 잘 보여주는 예는 아마 없을 것이다.


기술발전과 경제 성장의 중요성을 무시할 순 없지만 인간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하지 말이야 할 것이다. 인문학을 경시한 기술 일변도의 사회가 인류의 미래에 디스토피아를 선사하지 않을지 걱정된다. 하루빨리 문송하지 않은 사회가 도래하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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