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노력을 이것저것 하고 있다. '무디'라는 어플로 매일 감정을 기록하고 상담도 받는다. 모두, 지금은 헤어졌지만, 누군가와 연애할 때 나 자신이 너무 견디기 힘들어서.
오늘 상담 때 '연애만 하면 나타나는 괴물'이라고 표현했는데, 정말 연애만 하면 잠자던 괴물이 깨어나는 것 같아. 잔잔하던 기분의 파도가 쓰나미처럼 파괴적으로 출렁이고, 눈 뒤집힌 말위에서 균형을 찾으려고 애쓰는 기사처럼 자기 파괴적으로 치닫는 나 자신을 어찌할 줄 몰라하며 몸부림치다가 매번 파국인 것이다.
연애 안 할 때 나 자신은 자기 성취도 높고, 스스로의 모습도 꽤나 마음에 드는데, 연애만 하면 폭발적으로 화가 나고, 끝없이 애인에게 바라고, 사랑 못 받아 말라죽은 귀신이라도 빌어 붙은 거모냥 사랑을 계속 확인하려 하고 눈에 보이는 무언가 - 이를테면 약속을 포기하고 늦은 시간에 날 챙기러 와준다거나, 내 마음에 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라거나, 날 주려고 구웠다는 못생긴 쿠키라거나 - 사이의 길어진 공백을 견디지를 못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제가 연애를 그래도 많이 해봐서- 패턴이 보이네요. 제가 어떻게 망가져 있는지, 항아리 어디에 구멍이 뚫려있는지 알 거 같아요"라고 했고, 상담사님은 끄덕여주셨다. 상담사님은 구멍이 어떤 건지 들여다봐야 한다고 하셨는데,
글쎄, 나는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우물가에 선 사마리아 여인이 된 기분이다. 그게 그녀의 루틴이었으니 수십 번 수백 번 그 장렬한 태양을 뚫고 모두가 사막으로 가지 않는 시간에 사막에 나섰을 수 있다. 매번 절망하며. 어느 날은 기분이 좋은 일도 있었겠지, 주변 사람들과 더 잘 지내고 마음 맞는 이를 만나던, 목이 조금은 덜 타들어가던 일도 있었겠지. 어느 날은 물을 긷다가 물동이를 내던지고 울었을 지도, 누군가를 저주했을 지도, 자기 팔자를 한탄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가 나타난 거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달마야 놀자>라는 불교 배경 드라마에서 구멍 난 항아리를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채워지지 않자, 항아리를 강물에 던져 채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도 사실 내가 물에 뛰어드는 것이 답이 아닐지 어렴풋이 짐작으로만 짚어본다. 나는 원래 자세한 풀이는 못해도 본능적으로 답이 잘 끌리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저는 ㅇㅇ씨가 사랑하면서 자기 모습이 싫어지는 건 달라졌으면 좋겠어요. 누군가에 눈에 담긴 자신의 모습이 사랑스러웠으면 좋겠고..."
오늘 처음 알았는데 양이 시력이 상당히 나쁘다고 한다. 바로 앞의 양 엉덩이만 보고 쫓아간다고. 그래서 무리를 잃은 양은 정말 절벽에 데굴데굴 굴러 떨어질 수도 있다는 거다. 그래 제발 고장 난 나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세요. 내 발 앞의 등불이시여, 내가 그 불로 온 마을을 비추게 해 주세요. 빛이 어둠을 이기게 해 주세요. 내 안에 어두움을 몰아내 주세요. 내가 그 빛을 숨기지 않게 용기를 주세요.
다만, 답을 안다는 것이 그렇게 큰 희망인지는 모르겠다. 우리 모두 죽을 거라는 결말은 알지만, 정작 그 과정이 중요한 알맹이 아닌가?
그 와중에도, 멈출 수 없는 이 땅 가운데의 일, - 그저 평생에 걸쳐 수고로움을 더하는- 은 계속되어야 할지도. 상담선생님과 흙을 다시 움켜쥐어보고, 그게 무용할 것을 알면서도, 그 구멍 난 모양을 뜯어보는 일, 여러 기억의 파편들과 내 기저에 남은 상처자국을 대조해 가며 누구 탓이네, 뭐 때문이었네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
며칠 전에 아는 언니와 밥을 먹었다. 그 언니네 집에는 두 번째로 초대받은 거였는데, 지난번 룸메이트가 있을 때보다 더 확실해진 - 그러니까 더 흐릿해지고 더 다채로워진 - 언니의 취향이 가득 묻어나는 예쁜 공간이었다. 언니가 그랬다. "나는 몰랐어.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어르고 달래고 어떤 일련의 소요를 거쳐야 종식되는 것인지를." 그렇게 따지면 정말 우리 민속 신앙의 한풀이는 절차가 있고 공감이 있고 충분한 애도가 있어서, 과학적이고 지혜롭다고 할 수 있다.
혹은 물에 던져지는 일. 방법은 모르지만 답에 뛰어드는 일. 그래서 푹 잠겨 버리는 일. 사람은 물고기가 아니어서 - 아 물론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지만 - 터무니없이 당연하게도 물에서 살 수 없다. 물은 죽음이면서 동시에 삶을 상기시켜 준다. 강하게 열망하게 한다. 드넓은 모래사장에 끝도 없이 밀려오는 파도. 나를 향한 멈추지 않는 사랑. 해와 달이 뜨고 또 지듯이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듯이 너무 경이롭고 너무 완벽하고 너무 당연한 그런 사랑. 나를 받아주는 데가 없어서 하염없이 파도만 봤다는, 곽을 끌어안고 울던 김준형은 파도에서 사랑을 봤던 걸까? " 지나가는 기차를 보고 뭔가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나는 모르겠지만." 1호선 지나가는 게 베란다에서 보이는 청파동에 신혼집을 꾸린 언니가 그랬다. 아마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것들은 뭔가를 주나 보다. 심장박동 같이. 잠에 들도록 토닥이는 손길같이.
하와이로 떠나던 비행기에서, 그때는 어머니가 편찮으신 바람에 들숨에도 날숨에도 죽고 싶다는 염원만 가득했는데, 비행기가 추락할 것 같다는 공포가 밀려올 때 비로소 살고 싶었다. 나자레로 무작정 떠났던 한 대학생처럼. 8층 높이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던 그 심정을 부여잡고 아파트 8층 높이의 파도가 치는 나자레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빅웨이브 서퍼가 되었다는 정말 멋진 일이다. 세상에 멋진 사람들이 너무 많아.
견디는 미덕과 폭발하는 아름다움.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으니 주여 내게 때를 알게 하소서.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없었고, 다섯이나 있었지만 끝내 없었고, 구원을 만났으나, 그녀는 다시, 여전히 사마리아 사막 가운데 남겨졌다.
그리고 나도 다시 여기. 사마리아 사막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