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시골마을로부터 온 편
‘어느날 갑자기’.
소설을 읽다보면 대부분의 사건은 어느날 갑자기 발생한다. 어느날 갑자기 주인공이 사고를 당하고, 어느날 갑자기 전학생이 오고, 어느날 갑자기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물론 이 ‘갑자기’가 터무니없이 등장하진 않는다. ‘개연성’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의 설득이 실릴만한 복선이 깔리고 어느날 갑자기 주인공이 어떤 사건을 겪기 마련이다.
‘갑자기’라는 부사를 좋아한다. 갑자기 좋은 글감이 떠오를 때면 내가 꽤 똑똑한 작가가 된 것 같다. 드라마를 보다 갑자기 엄마가 생각나 전화를 걸 때면 내가 꽤 사랑스러운 딸이 된 것 같다. 길을 가다 갑자기 옛날에 즐겨듣던 음악이 떠올라 유튜브로 찾아 들을 때면 내가 꽤 낭만적인 사람이 된 것 같다. ‘갑자기’는 뭐랄까, 작당모의를 부추기는 단어같다. 예상치 못한 꽤 재미있는 사건의 시작을 암시한달까. 로맨틱은 덤.
다독이는 글쓰기 첫 시간은 무릇 다른 모임들이 그렇듯 참가 계기로 시작한다. 각각 나름의 이유가 있겠으나 의외로 ‘갑자기’란 답변이 많았다. “어느날 갑자기 글을 써보고 싶어서 시작하게 됐어요.” “불현듯 뭔가에 이끌려 신청했어요,” 역시 ‘갑자기’는 새로운 일을 도모하기에 최상의 단어다. 하지만 소설과 마찬가지로 속내를 들여다보면 시작이 ‘갑자기’ 일뿐 진짜 ‘갑자기’는 아니다. 글을 보면 쓸 수 밖에 없는 속속들이 이유가 알알이 꽉 차 있었다.
-퇴사자
-은퇴자
-육퇴자
100%는 아니지만 대게 20대 후반의 첫 직장 퇴사자, 30대 후반에서 40대 초중반의 육퇴자, 60대 후반의 은퇴자가 다독이는 글쓰기의 주요 멤버다. 지나온 삶을 정리해 보고 싶은 마음이 일순위, 이를 지렛대 삼아 새로운 발판을 만들어 보고 싶은, 책을 내게 된다면 제2의 인생을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이순위. 물론 1인 미디어의 시대이다보니 제도권 밖으로 나와, 나만의 정체성을 살린 플랫폼을 만드려는 초석으로 글쓰기 클래스를 듣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퇴사자, 은퇴자, 육퇴자는 원의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에 있는 사람들일 수 있다. 자발적 혹은 타발적으로 원의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벗어난 사람들. 그들에게 글은 ‘구심력’이 되어준다. 불확실한 미래, 아니 오늘 하루 마저 희뿌연 안개로 가득해 방향감을 상실했을 때, 잡념으로 가득한 머릿속을 분리수거 하고 싶을 때, 무엇보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내 자리를 잃어버린 것만 같을 때, 수많은 상실감은 글쓰기를 부추긴다.
한 번은 퇴사와 육퇴 두 개의 육중한 무게감을 등에 업고 글쓰기 클래스에 참여하신 분이 있었다. 유럽의 작은 시골 마을에 살았던 그 분은 본인의 의지와 다르게 배우자로 인해 유럽으로 이주해 경단녀가 되었고, 큰 사고와 재활을 겪으며 아픔을 통과했다.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힘든 시기에 우리는 만났다. 수업 시간에는 가장 말수가 적었지만 제출한 글은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가장 뛰어났다. 하나같이 마음을 다해 쓴 글들이었다. 직접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지 않았으나 글을 통해 지나온 삶을 알 수 있었다. 글을 읽으며 조금 울었다. 동시에 그분이 적어도 자신의 마음을 글로 정리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에 안도했다.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오직 글을 통해서도 마음을 나눌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한 달간의 글쓰기 클래스가 끝났고, 몇 년이 흘렀다.
‘어느날 갑자기’ 학인으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5년의 독일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의 귀국 짐을 싸던 때였다. 그냥 메일을 보낸다는 그 말이 반가워 왈칵 눈물이 날 뻔했다. 그 시절의 문장들이 선연했다. 꽤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나를 기억하는 어떤 이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글쓰기 클래스에 참여했을 당시 자신의 정신은 나락으로 떨어져 있었다고, 글을 통해 아직은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다고, 코로나로 더 퍽퍽해진 일상에 단비가 되었다고, 그래서 당신도 귀국하는 나를 응원해 주고 싶었다고...
“아무튼 작가님을 응원하고 싶었어요.”
메일의 마지막 문장 앞에 한참을 서성였다. 이번엔 처음 학인의 글을 읽었을 때 보다 좀 더 많이 울었다. 단 눈물의 형질이 달랐다. 그것은 기쁨의 눈물이었다. 낸시 슬로님 애러니는 <내 삶의 이야기를 쓰는 법>에서 ‘몸에 깃든 슬픔을 몸 밖으로 끄집어내서 글을 쓰라’고 했다. ‘안 그러면 그 슬픔이 당신 안으로 더 깊이 파고 들 것’ 이라고. 자신의 슬픔을 꺼낼 수 있었던 학인 분의 용기에 감사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슬픔이 있다. 그 무게감 역시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 꽁꽁 묶어둔 슬픔을 끄집어 내, 자신의 고통과 헤어지는 행위가 글쓰기의 다른 이름 아닐는지. 우리가 만났던 파리하게 시린 유럽의 겨울이 지나고, 창밖에선 목련이 진 자리에 벚꽃잎이 흩날렸다.
그분은 여전히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글을 쓰기 전과 후, 삶을 바라보는 태도는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글쓰기 클래스 학인들이 퇴사, 은퇴, 육퇴 후 글을 쓴다고 해서 인생이 180도 달라지거나, 완전히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호언장담하지 않는다. 다만 혼란스러운 그 시기에 글쓰기를 통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무언가를 쓴다고 해서 드러나는 달라짐은 없겠지만 조금은 내 마음이 내가 원하는 쪽으로 이동해 있다면, 그것만으로 족하다. 나를 새롭게 발견하는 마음과 다르게 보는 시선, 그 생각을 기록하는 시간이 나를 특별하게 만든다. 나탈리 골드버그가 말했듯, ‘우리가 힘을 얻는 곳은 언제나 글 쓰는 행위 자체’에 있으니. 다시 한 번 ‘어느날 갑자기’의 충동성이 가진 힘을 떠올리며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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