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설산까지 쭉 뻗은 도로는 온통 빙판이었다. 브레이크 고장 난 열차에 탄 기분이랄까. 'Highway to hell'를 부른 락커 AC/DC도 분명 아이슬란드 빙판길에서 영감을 얻었을 게다. 여기서 미끄러진다면 노래 제목처럼 되기 십상이니 말이다.
200m 전방에 멈춰 선 빨간 경차를 발견하곤 브레이크를 밟았다. 80.. 60.. 계기판 속도 바늘 침이 좌측으로 가라앉나 싶더니, 브레이크 페달을 밟은 오른 발바닥에 진동이 전해졌다. 드드드득. 쇠 포크로 칠판 긁는듯한 섬뜩함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가 미끄러질 때 느낌이다.
빗자루로 쓸어댄 빙판 위 컬링 스톤 같았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워도 차는 멈출 줄 몰랐다. 아버지께 배운 '엔진 브레이크'도 소용없었다. 아, 그다음에 뭐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그렇게 되기까지 속도를 내지 말거라." 역시 아버지 말씀 틀린 게 하나 없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횡단보도 위에서 사고를 당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답답했다. 돌진하는 차량을 왜 안 피하고 쳐다만 보나 싶어서다. 하지만 겪어보니 피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아내와 나도 눈 동그랗게 뜨고 '어어어?!' 소리만 질러댈 뿐 피하여야겠단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깐. 볼 때와 할 때가 다르다더니, 사실이었다.
결국, 앞 차와 20cm 즘 남겨두고 우측으로 핸들을 홱 꺾었다. 다행히 충돌을 피했고, 차는 비탈길에 반쯤 걸쳐진 채 멈춰 섰다. 쿵쾅쿵쾅. 요란하게 울어대는 대는 심장 소릴 대신해 앞 차를 향해 최대한 상스럽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야이 XXX야". 말하고 나니 속이야 시원했다만 참 미안했다. 앞 차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인데 내가 왜 욕하지?
사람들이 하나둘 요쿨살론을 떠나고 있었다. 나와 아내는 그 사이를 비집고 호수로 향했다. 문 닫는 놀이공원에 몰래 들어가는 기분이랄까. 수평선 너머로 지는 해는 영업 종료 안내 방송 같았고, 어둑해져 가는 호수 반대편은 퇴근 앞둔 공원 직원들이 나가라며 불을 끄는듯했다. 딱. 발에 차인 커다란 자갈돌도 마저도 이렇게 묻는 듯했다. ‘10분 후면 문 닫는데도 들어갈 거야?’. 하지 말라니 더 하고 싶었다. 어릴 적 청개구리 심보가 아직도 남아있나 보다. 아니, 이건 호기심이다. 대체 이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지름 1.5km 남빛 커다란 호수는 말이 호수지. 만(灣)처럼 느껴졌다. 하늘마저 담아낸 듯 투명했고, 그 위를 유영하는 크고 작은 얼음덩이들은 호수를 터 삼은 듯 보였다. 얼음덩이는 뾰족하기도 넓적 대대 하기도 했다. 보고 있자 하니 팔 괴고 옆으로 드러누운 사람처럼 생겨 피식 웃음만 났다. 말로만 듣던 '빙산의 일각'이 눈 앞에 있었다. 전체 크기 10%만 수면 위로 떠오르니 수면 아랜 9배나 더 크다는 이야기다. 호수 가장 깊은 곳이 248m라는 말에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타이타닉』의 거대 유람선도 수면 아래 거대 빙산을 간과해 침몰했으니 말이다.
1m 높이 얼음덩일 의자 삼아 두 번째 웨딩 촬영을 시도했다. 아내 두 뺨에 연지 곤지 칠해줄 사람도, 순백색 웨딩드레스나 늠름한 턱시도도 없어 '촬영'이라 부르기엔 초라했지만, 기어코 카메라를 든 이유는 아이슬란드였기 때문이었다. 여행 내내 경험한 마법 같은 순간들은 ‘아이슬란드의 기적’이었고, 나에겐 이번에도 그럴 거란 믿음이 있었다. 과감히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찰칵.
깜짝 놀랐다. 아이슬란드는 다시 한번 마법을 부렸다. 호수 위로 내려앉은 해 질 녘 작은 빛에 어둑하던 호수는 일순간 금빛으로 변했다. 호수 너머 설산(雪山)과 황량한 얼음벌판엔 푸른 은빛이 만연했다. 아내는 은빛 웨딩드레스를 입은 새 신부가 되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장인어른 손을 맞잡던 며칠 전 결혼식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다. 내 어깨엔 속 깊은 남빛 호수가 둘러져 턱시도가 되니, 입장 앞둔 새신랑처럼 자신감 넘쳐 보였다. 검은 나비넥타이는 없었지만, 며칠 전 결혼식 때 느꼈던 긴장과 감격의 순간으로 되돌아간 듯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웨딩 사진이 또 있을까.
바다 너머로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있었다. 벌겋게 타오르며 춤추던 하늘도 진정된 듯 제 색을 되찾고 있었다. 언덕을 내려오며 어두워진 요쿨살론을 보며 생각했다. 이젠 진짜 막 내릴 시간이 아닐까.
6년 전 미국 다큐멘터리를 통해 요쿨살론을 알게 되었다. 아름다운 모습에 살아생전 가보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지만 '좋은 꿈'은 아니었다. 내 평생 일어날 리 없다 단정 지어버린 '나쁜 꿈'이었다. 아이슬란드에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지구 어딘가에 있을 빙하 호수겠거니'하고 머릿속에 남겨두었을 뿐.
기억이 떠오른 건 여행을 준비하면 서다. 가보고 싶은데 어쩌지 고민하다가 요쿨살론을 내 별 중의 별로 삼기로 했다. 그래서 별을 따라간 아이슬란드다. 요쿨살론에 도착한 순간부터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토끼굴에 들어온 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꿔오던 꿈이 눈 앞 현실로 펼쳐지니, 토끼굴을 되돌아 나가고 싶지 않았다. 계속 머무르고 싶었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면 '영원'이라는 말을 하나보다.
하지만 이제 꿈에서 깰 시간이다. 나는 더 이상 동쪽으로 향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뒤돌아 레이캬비크로 가기로 했다. 거기에서도 또 다른 아이슬란드를 만날 수 있을 거다. 아마 동쪽으로 더 간다면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라는 연약한 인간은 매혹적으로 손짓하는 아이슬란드에 빠져들게 분명하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