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 여행기
쉬들란뒤르, 블루라군 실리카 호텔 가는 길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초겨울 비웃듯 파릇한 이끼와 틈새 비집고 고개 내민 거묵한 현무암이 만든 기이한 풍경 덕분이다. 차창 너머로 그려대는 초록빛깔 선율따라 엑셀을 밟았다 떼길 반복했고, 신난 우리 마음처럼 차도 춤추는듯했다. 아마 한국이었으면 욕 다섯바가지는 먹었을거다. 뒤에 차가 없길 망정이지.
작은 동굴 입구를 발견하기도 했다. 툭치면 무너질 나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야 했는데, 호기심에 반쯤 내려가다 본 경고문에 겁먹고 허겁지겁 다시 올라왔다. '가이드와 안전 장비 없이 들어가면 네 책임!' 이었던가. 위에서 팔짱끼고 지켜보던 아내는 '네가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체크인 시간 못 맞추면 다 네책임이야"라며 핀잔을 주었다. 아니, 살다 보면 늦을 수도 있는 거지. 너무 한다.
호텔까지 가는 동안 투닥거렸다. 칼같이 지키겠다고 약속한 체크인 시간을 40분 지나고서야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호텔 입구를 들어가려다가, 입구 앞에서 한참을 헤벌죽 서있었다. 흰색, 검은색, 그리고 나무로 이뤄진 외관이 마치 빙하, 화산, 그리고 자연이 어우러진 '아이슬란드'를 떠올리게 해서다. 한 편의
예술작품을 본 기분이랄까.
로비도 매끈하게 연마된 검은 현무암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오돌토돌한 질감이 주는 입체감에 고급 호텔에 온듯 어깨를 으쓱하게 했다. 마침내 좋은 곳에 아내를 데려왔달까. 하지만, 정작 신기해한 건 나였다. 걷는 내내 '우와'하는 탄성 소리를 카운터까지 이어갔고, 입 쩍 벌리고 고개만 좌우측으로 연신 돌려댔다.상모 돌리기처럼 말이다.
카운터 직원이 체크인을 돕는 동안 우측 전면 유리창 너머를 바라봤다. 짙은 하늘빛 온천수 위로 고개만 빼꼼 내민 네댓사람이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처리를 마친 직원은 저기가 호텔이 자랑하는 프라이빗 라군(Private Lagoon)이라는 이야길 해주었다. 바닥에 깔린 실리카 양이나, 수질이 퍼블릭 블루라군 보다 좋으니, 오늘 밤 꼭 가보라는 추천도 덧붙였다. 내가 온천 좋아하는 줄 어찌 알았나 모르겠다. 뜨신 물에 몸 지지고 나면 피로가 싹 풀릴텐데. 가끔 입꼬리가 제멋대로 움직일 때가 있는데, 지금이다. 어찌나 높이 올라가버렸는지 내려올 생각을 않는다.
객실에 짐을 던져두고, 라군으로 달려갔다. 탈의실을 나와보니 해가 지려는 듯 어둑했다. 자그마한 노란 조명이 하늘빛 온천을 밝히고 있었는데, 오히려 환했던 대낮보다 운치 있어 보였다. 초등학교 때 배운 대로 온천수를 손부터 적시기 시작했다. 한국 목욕탕의 뜨끈한 열탕을 기대했는데, 자판기 hot 음료 정도의 미지근함은 다소 아쉬웠다.
물속에서 한참을 걷다가 머리에 느낌표가 떴다. 온천 바닥이 죄다 하얀 진흙이었다. 어쩐지, 발바닥이 푹신하다 싶었다. 용암이 굳은 바위에서 난다는 천연화합물 실리카(규소)는 화장품 원재료로 많이 쓰이는데, 피지나 각질 제거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평소 가꾸지도 않던 피부였지만, 막상 눈 앞에 치료제가 있다 하니, 발가락 꼼지락이며 퍼올리기 바빴다. 상반신 전체를 펴 바르곤 둘이 마주 보고 섰는데, 참다못한 깔깔 웃음이 터져버렸다. 왠 허연 '밀가루 괴물 두 마리'가 서있는 건지.
내내 껴안고 있던 백인 커플마저 나가니, 온천은 우리 부부 차지였다. 수영 잘하는 아내는 물 만난 인어로 변신했다. 접영, 배영 등 온갖 기교를 부리며 갈퀴 달린 꼬릴 흔들어대는 모습에 휴양지를 갔으면 얼마나 더 좋아했을까 싶었다. 잠깐 사이 신나서 멀찌감치 헤엄쳐 가더니, 이젠 손까지 흔든다. 나참, 진짜 좋은가 보다. 여행 내내 빙판만 돌다 갔으면 어쩔 뻔했나.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나른함에 침대로 몸을 날렸다. 킹사이즈보다 넓은 더블베드는 대(大) 자로 뻗어도 세상 편할만치 넓었다. 아내는 객실 내 비치된 커피머신으로 커피를 끓이고 있었고, 나는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상견례 자리가 떠올랐다. 늘 설명하고 이해시키길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신혼여행이란 무엇인가?’를 열변하셨다. 그리고 신혼여행은 ‘부부가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시간’이라는 결론 내리시며 아이슬란드 여행을 꾸짖으셨었다. 왜 추운 나라 가서 고생이냐며. 능글맞은 아들은 ‘에이, 요즘 그런 게 어디 있어요.’라며 흘려 넘겼다. 돌이켜보니 아버지 말씀도 틀리지 않단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너무 아이슬란드로만 채웠던 건 아닐까? 아이슬란드는 배경일뿐이고, 우리가 중요한데.
아내가 끓인 커피 한 잔씩 들고 테라스 나무데크 끄트머리에 앉았다. 객실이 유달리 넓어 보였던 게 오픈형 테라스 때문인가 보다. 들고 있던 커피잔에서 춤추듯 허연 김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한 모금 마시곤 아내에게 속 품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아이슬란드 어땠어? 뭐가 제일 기억에 남았어?”
질문을 던진 내 머릿속에도 수많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 이 것도 좋았고, 저 것도 좋았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혹은 '자기는 내 어떤 부분이 좋아서 만났어?' 처럼 답 없는 질문이었다. 꼽아보자면 아내가 오로라 처음 본 날을 말할거라 생각했다. 신나 하던 아내 모습이 가장 인상 깊었다. 하지만 아내 답변은 조금 달랐다.
“비행기 잔해를 보러 갈 때였어. 살면서 사막처럼 허허벌판인 곳을 갈 일이 또 있을까 싶었어. 무엇보다 힘든 건 끝이 안 보이는 길을 걸어야 할 때였어, 하지만 남편이 있으니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제일 좋았어.”
기대치 못한 답변이었다. 힘들다고 징징할 땐 언제고, 기억에 남는다니. 아내와 10년을 만났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녹색인 줄 알았던 오로라가 하얗듯이 말이다. 나 역시 힘든 상황에서도 곁을 지킨 아내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우리는 여행 내내 아이슬란드를 이야기했지만, 어려움을 함께 걷는 법을 배웠다. 어쩌면 우리가 나눴을 수만 가지 미래 계획보다 소중한 한 가지가 아닐까.
구름 사이로 모래알처럼 수많은 별들이 보였다. 그리고 더 이상 볼 수 없을 마지막 오로라가 아련히 떠올랐다. 구름에 가려져 선명하진 않았지만, 한가진 알 수 있었다. 하얀색. 오로라는 녹색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