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라도 더 머무를 수 있을까?
마음 속 깊은 바램이 이뤄진건 처음이다. 속으로 외쳤던 '가기싫어!'가 현실이 되버릴 줄이야.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데, 비행기 출발을 지연하겠다는 안내방송에 화들짝 놀랬다. 평생의 운을 쓰는 날이 있다더니, 오늘이 그 날인가보다. 아니다. 어쩌면 그동안 숱하게 버렸던 '꽝'복권을 생각하면, 억만장자가 될 기회를 놓쳤는지도 모른다. 하하.
이른 아침 작은 창에 걸린 컴컴한 하늘이 어느새 익숙하다. 여행 둘쨋날 아침에 당황했던 한가지가 바로 '일출과 일몰'이었다. 이 곳에 오고나서야 '동에서 떠서 서로 진다.', '오전 6시에 떠서, 오후 6시에 진다' 등 어린시절부터 숱하게 들었던 이야기들엔 한가지 수식어가 빠졌음을 깨달았다. '한국에서는'이다. 지구과학을 전공했다면 콧웃음을 칠 이야기지만 나같은 범인에겐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해가 남쪽에서 뜨고 지며, 10시에 떠서 4시면 질거란 상상을 언젠가 해보았던가. 우물 안 개구리가 세상 구경간 꼴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덕분에 보고 듣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더라.
엔진 시동음 소리가 들리고 오래지 않아,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얼마나 멀어지려는 걸까, 활주로 너머 커다랗던 눈 덮인 산이 작아지더니, 이젠 조그마한 언덕처럼 보인다. 링로드 위를 노다니는 조그마한 차들을 보며 어제만 해도 지나던 길을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이 앞선다. TV에서 흔히 하는 '만감이 교차한다'는 기분이 이 기분인가 보다. 시원하고, 섭섭하고, 아쉽고, 슬프다. 그리고 기쁘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다. 억지로 광대를 치켜올려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이 모든 감정들의 중심에서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구름 너머로 사라져가는 아이슬란드를 보며, 레이캬비크를 떠나던 날이 떠오른다. 그 날도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 지 몰라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만 긁적이다가 떠났다. 만약 내가 일기를 쓴다면 회색빛 표지의 말끔한 노트에 삐뚤한 글씨체로 이렇게 적었을 것이다. '만남은 길게, 이별은 짧게.'
만남은 길게, 이별은 짧게
그 날 오전엔 비가 왔었다. 침대에서 뒹굴다가 느지막이 아점을 차려먹었다. 밤새 비가 얼마나 많이 오던지 창문을 토닥이던 빗방울 소리에 두어 번은 깼다. 오늘은 무얼 할까 생각하다가. 근사한 작별을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서? 어떻게? 한참을 생각하다가 잦아드는 빗소리에 아내 손 붙들고 무작정 라우가뷔거(Laugavegur) 거리로 나왔다.
전날도 잠깐 들렀었지만 꽤나 인상적인 거리였다. 여행객들의 재잘 웃음소리와 타박 발걸음 소리, 그리고 거리 연주자들의 구수한 아코디언 소리가 마치 게임 속 배경음악처럼 자연스럽게 들렸고, 마법에 걸린 행인들의 딱딱하지만 격동적인 걸음은 폴짝이는 음악 소리에 발맞춘 호두까기 인형과도 같았다.
우리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나무굴로 뛰어든 건 아닐까? 동화 속 마을처럼 아름다운 이 곳은 현실감각을 잃어버리기에 딱 좋았다. 바닥에 떨어진 바스락이는 낙엽이 헨델과 그레텔이 뿌려둔 빵 부스러기가 아닐까 싶어 따라가 보기도 했고, 작은 기념품점 앞에서 만난 퍼핀(Puffin) 인형을 든 꼬마요정이 웃으며 손 흔드는 모습에 홀딱 반하기도 했다.
레이캬비크 시청 옆 호수에선 밤이면 왕자로 변한다는 11 백조도 만났다. 남성을 어찌나 싫어하던지, 아내 앞에선 얌전하던 녀석들이 내가 다가가니 죄다 도망가 버렸다. 뒤통수에서 들린 푸드득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새들이 대각선으로 날고 있었다. 거센 바람 덕에 힘찬 날개짓에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이 어찌나 웃기던지 한참을 웃어댔다. 나중에 촬영한 동영상을 나중에 들어보니 배꼽빠지는듯한 웃음 소리만 녹음 되었더라. 뭐, 동화 속에 하나쯤 있을 법한 마법이 아닐까.
아침에 눈 뜨며 했던 상상은 할그림스키르캬를 바라보며 인사하는 모습이었다. 막상 스콜라버더스티거(Skólavörðustígur)거리 끝에서 교회 정문을 마주보고 섰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어떤 모습으로 인사를 해야하는걸까. 쿨하게 '안녕!'을 외치고 뒤로 돌아설까? 아니면, 교회 첨탑에서 레이캬비크를 내려다보며 '안녕'을 외쳐보는 건 어떨까? 교회 정문에 우뚝 선 레이프 에릭슨 상(Leifur Eiríksson)도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어떻게 해도 아쉬움을 덜어내긴 어려울 것 같다. 머리만 긁적이다가, 그냥 뒤돌아 섰다. 누가 그러더라 만남은 길게, 이별은 짧게 하라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돌아와보니, 어느새 아이슬란드는 구름이 가려버렸고, 아내는 옆에서 잠들었다. 아내가 좋아하는 파리에 들렀다가 한국으로 돌아가겠지만 실감이 안난다. 잠깐 자고 일어나서 오로라를 보러 가야 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