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맥스 Max Nov 29. 2020

[월간 성수동] 이번 정차할 곳은 성수동입니다

2020년 9월

십수 년 전, 현장 연구를 위해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을 방문하고 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막 몸을 실었을 때다. 똑같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 한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어림잡아 100여 명쯤 되어 보이는 그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명찰을 목에 걸고 노란색 서류 봉투를 품고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호기심이 일었다. 그들이 처음 비행기를 타보는 사람들임을 알아차리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무리 중 한 명인 40대 방글라데시 남성의 옆자리에 앉게 됐다. 세 아이의 아빠라는 그에게 비행기 좌석의 안전벨트 매는 법을 알려주다 대화가 이어졌다. 그가 두 손에 꼭 쥐고 있던 노란색 서류 봉투를 건넸다. 봉투 안의 서류를 확인하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들은 가족 품을 떠나 일자리가 있는 태국의 농장으로 향하던 방글라데시 농민이었다.


아주 오래전 일이 갑작스레 떠오른 것은 출근길 집을 나서기 전 마스크를 챙기면서였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서는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것도 금기시된 요즘, 다른 나라로 떠나는 일은 언감생심이다. 그러다가 집을 떠나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로 생각이 이어졌다. 코로나로 인해 전 세계가 단절된 지금, 국경을 넘어야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던 그들은 어떻게 삶을 이어가고 있을까?


활기찬 목소리로 가득하던 카페도, 식당도, 공장도 문을 닫고 있다. 일자리를 잃은 프리랜서들은 사회 안전망에서 벗어나 불안한 삶을 산다. 가정이나 사무실을 방문해 일하던 사람들이 휴업 상태에 놓인 것도 수개월째다. 코로나가 확산과 소강, 그리고 다시 확산을 반복하는 사이 그간 버텨왔던 인내심은 물론 생존을 위한 여력도 고갈되고 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을 멈추게 된 건 지하철 안내 방송이 나왔을 때다. “이번 역은 서울숲, 서울숲역입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회사가 위치한 성수동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성수동은 최근 ‘소셜벤처 밸리’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강남의 테헤란 밸리나 강북의 공덕동에 이어 사회문제 해결 등 사회 혁신을 꿈꾸는 스타트업의 성지로 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코로나19로 미래가 불투명한 날들이지만 성수동으로 출근할 때만큼은 무거웠던 가슴이 조금 트인다. 꽤 오래전부터 성수동에서는 우리 사회가 봉착한 여러 문제점을 타개할 다양한 실험과 시도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수동에만 400곳 이상의 영리·비영리 조직이 모여 있다. 인공지능을 활용해 청각장애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소보로’, 발달장애인을 적게는 수십에서 수백 명 채용하고 있는 ‘베어베터’와 ‘동구밭’도 성수동 기업이다. ‘루트임팩트’와 ‘열린옷장’도 성수동에 베이스캠프를 두고 영리와 비영리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한국을 넘어 세계로 교육 모델을 확장하고 있는 ‘점프’나 ‘에누마’, 최근 혁신에 대한 물음을 던졌던 ‘타다’도 성수동에 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조직들이 모여들다 보니 이들을 지원하고 돕는 곳도 속속 성수동에 자리를 잡고 있다. 혁신 기업들이 공동 출자해 만든 ‘임팩트얼라이언스’, 정부와 지자체의 소셜벤처·사회적기업 육성지원센터들도 성수동을 택했다. 자본 투자를 통해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옐로우독’ ‘HGI’ ‘디쓰리쥬빌리’ 등 국내 임팩트 투자사 대부분이 역시 성수동에 둥지를 틀고 있다.


지리적으로 성수동은 분당선 서울숲역과 2호선 뚝섬역·성수역 근방을 말하지만, 이제는 단순한 행정구역을 넘어 새로운 정신을 대변하는 장소가 되어가고 있다. 성수동에서는 영리와 비영리가 만나고, 사회와 혁신이 만나고, 재무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가 만난다. 성수동에서 일한다는 것은 융합되지 않을 것 같은 것을 융합해 이전에는 시도하지 않았던 것을 시도한다는 뜻이다. 이른바 ‘성수동 스피릿’이다.


코로나19가 촉발한 경제 위기로 일자리와 미래를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기후 위기는 이보다 더한 충격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가 여전히 많기에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도 도전과 실험을 멈출 수 없다. 세상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모여드는 곳.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동료와 파트너를 만날 수 있는 곳. 오늘도 나는 성수동행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2020년 10월 20일에 조선일보의 공익섹션, [더나은미래]의 연재 칼럼 '월간 성수동'에 실린 글입니다. 

성수소셜밸리, 소셜벤처의 메카로 불리는 성수동과 그곳 사람들 등 임팩트 생태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http://futurechosun.com/archives/5052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