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월요일 저녁이면 우리 집에서는 아이를 일찍 재우기 위한 작전이 진행된다. 그래야 저녁 10시 30분에 시작하는 음악 경연 프로그램의 본방을 사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을 보면서 매회 놀라곤 하는 것은 노래 잘하는 사람이 정말 많다는 것이다. 치열한 예선을 치르고 방송 출연의 기회를 얻은 분들이니 실력이야 검증받은 셈이지만 경이롭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음악 서바이벌 프로그램 시청을 멈추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를 꼽으라면 경연 과정을 통해 ‘성장’해 나가는 참가자들을 볼 때의 감동 때문이다. 매주 경쟁과 탈락이라는 긴장의 순간을 마주하면서도 기어이 더 발전한 모습을 선보이는 참가자들에겐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그렇기에 가장 안타까운 순간은 그간 꾸준히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 실력자들이 탈락하는 때다. 노래를 잘하는 것만으로 유명한 가수가 될 수는 없다는 현실은 뼈아프다. 그래서일까, ‘탈락’이라는 성적표를 받아 든 순간에 보여주는 참가자들의 모습을 유심히 보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경연 프로그램에서 가장 멋진 순간이 아닌가 싶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며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모습,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당황하는 표정, 경쟁자를 축하하거나 고마움을 전하는 모습, 하염없이 눈물을 보이는 사람들….
살면서 내가 하는 일들의 성적표를 바로바로 받아볼 기회는 적다. 그것도 한 번의 무대에서 운명이 판가름 나는 결과라니. 마치 매주 수능을 보는 기분이 아닐까? 하지만 이렇게 괴로운 탈락의 순간에도 ‘후회 없는 무대’였다는 소감을 전하는 참가자들이 있다.
‘후회 없다’는 이 네 글자가 주는 울림은 상당히 크다. 다른 사람의 평가로 매겨진 결과에 순응하는 수동적인 인간이 아닌, 최선의 결과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은 스스로를 다독여줄 수 있는 주체적인 한 인간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앞에 펼쳐질 인생의 서사에서는 그 무대가 끝이 아니기에, 앞으로도 후회 없이 나아가리라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한 인간의 모습이 그곳에 있다.
살아가다 보면 남에게 평가를 받아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단 한 번의 기회에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보여줘야 하는 순간은 피하고 싶어도 찾아온다. 창업가들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동료들의 기대와 미래를 걸고 그런 시험대에 오를 때가 많다. 다시없을 기회일지 모르는 숨 막히는 긴장의 자리. 후회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 창업가들은 언젠가 다른 자리에서 다시 만나면 몰라보게 성장해있는 경우가 많았다.
투자사에서 일하게 된 이후로 나는 대부분 평가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우리 회사의 자본 또한 한정되어 있기에 어제도 오늘도, 투자를 거절하는 메일을 써야 했다. 그럴 때 스스로에게 자문하곤 한다. 투자하지 않으면 ‘후회하지 않을까’라고 말이다.
음악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들이 종종 하는 말이 있다. 바로 녹음실의 음원 강자와 무대 위의 강자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 무대에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닐 수 있다. 고작 서류 몇 장, 몇 번의 미팅만으로 창업자와 비즈니스를 모두 이해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승패를 가르는 것은 의외로 압도적인 차이가 아닌, 뒤를 돌아보지 않을 자신이 있는 ‘후회 없는’ 최선의 마음가짐은 아닐까. 어떤 순간에도 후회 없는 모습을 나누는 자리가 많으면 좋겠다. 투자를 받지 못해도 후회 없을 창업, 투자를 하지 못해도 후회 없는 지지와 응원이 2021년 이어지길 기대한다.
2021년 1월 29일에 조선일보의 공익섹션, [더나은미래]의 연재 칼럼 '월간 성수동'에 실린 글입니다.
성수소셜밸리, 소셜벤처의 메카로 불리는 성수동과 그곳 사람들 등 임팩트 생태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https://futurechosun.com/archives/533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