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해 Oct 01. 2019

그 많던 시간은 누가 다 써버렸을까

사회 초년생일 때, 재테크 책을 많이 읽었다. 그때 통장 쪼개기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이렇다. 통장을 쪼개는 이유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다. 돈을 큰 덩어리로 두면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새어 나가는 돈을 막을 수 없다. 덩어리가 크니 그중 일부를 떼어가면 잘 티가 나지 않아서. 가랑비에 옷 젖듯 졸졸 나간 돈이 결국 통장을 텅장으로 만들어버린다. 돈을 용도에 맞게 쪼개 두면 그 용도에만 사용하니 돈을 더 절약할 수 있다.


갑자기 어인 돈타령이냐고? 시간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회사 다닐 때는 시간이 늘 부족했다. 왕복으로 3~4시간이나 걸리는 장거리 출퇴근자이기 때문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회사에 가고, 회사에서 6시 땡 하고 엉덩이 떼고 나와도 집에 도착하면 8시가 넘었다. 내일 출근하려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고... 오늘이 떠나는 게 아쉽다고 미적거리다간 다음 날 회사에서 괴로울 뿐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아니지, 사실은 자주 12시를 넘겨 잠이 들었다. 오늘 하루 한 일이라곤 회사에 다녀온 일밖에 없다니. 그런 마음이 들면 쉽게 잠들지 못했다. 책이라도 몇 장 더 읽다가 잘래. 인터넷 바다를 더 휘적이다가 잘래. 눈은 이미 반 넘게 감겨와도 꾸역꾸역 참았다. 아쉬워서. 억울해서. 그때는 24시간을 24시간보다 많이 쓰기 위해 노력했다. 욕심이 많았다. 악착같았다.


5시 반에 기상, 6시에 씻고 아침을 먹었다. 7시면 마을버스에, 7시 반이면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회사까지 1시간, 지하철은 달리고 나는 책을 읽었다. 환승하면서 다음 열차를 기다릴 때에도 책을 펼쳤다(물론 걸어 다닐 때는 보지 않았다). 회사 앞에 도착하면 근처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 아침을 못 먹고 나올 때는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하나. 9시간을 회사에 묶여 있다가 6시에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메모 앱에 글을 쓰고, 집에 오면 그것을 정리해 블로그나 브런치에 글을 올렸다. 저녁 먹고 나서는 엄마와 함께 드라마를 봤다. 전화영어를 하고, 인터넷 서핑도 좀 하다가 잠이 들었다.


와, 적어놓고 보니 내가 정말 바쁘게 살았구나. 그런데 지금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눈을 뜨면 하루의 반이 사라져 있기도 하고, 하루 종일 한 일이라고는 집 근처 공원에 운동 다녀온 일밖에 없기도 하고. 한 일이라곤 출퇴근밖에 없어서 억울해 잠 못 들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그 많던 시간은 누가 다 써버렸을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래도 나에게 시간 경계가 사라져 버린 탓 같다. 예전에는 그랬다. 이 시간까진 무엇을 해야 해. 이 시간까진 어디를 가야 해. 하루에도 몇 번씩, 마감 시간이 있었다. 평소에는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아주 사소한 마감 시간. 지금 내겐 마감 시간이 없다. 내 시간에는 그런 경계가 사라졌다. 큰 한 덩어리로 존재한다. 쪼개지 않은 통장처럼 말이다.


통장 쪼개기를 모르는 사회 초년생이던 나는, 시간 쪼개기를 모르는 백수 초년생이 되었다. 통장 쪼개기를 차근차근 실천해갔던 그때를 다시 떠올려 봐야겠다. 이번에는 통장 말고 시간을 쪼개 보려고. 24시간을 24시간보다 많이 쓸 수야 없겠지만 12시간으로 쓸 수는 없지 않은가. ‘알차게’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후회하지 않는 수준이면 좋겠다. 지나간 어제는 다시 오늘이 되지 않을 테니까.


사족_ 아아, 그러고 보니 이제 고정 수입도 없으니 쪼개 둔 통장들이 하나로 합쳐지게 생겼다.








*글 제목은 박완서 작가님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따왔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시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