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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형 Nov 25. 2019

송년을 준비하라

연말의 문지방 위에서

  01.

  가을이 막바지인 것을 감안해도 아주 이른 날이었다. 예상은커녕 기대도 하지 않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밤 중에 눈이 내렸다. 첫눈이었다.

  

  눈은 모두가 잠든 때에 조용히 왔다. 기척도 소리도 없어서 곤히 잠든 사람들이 알아차리긴 무리였다. 가뜩이나 월요일에 시달려 피곤한 화요일 새벽이었다. 눈은 아침이 되기 전에 인사도 없이 갔다. 봐주는 이도 배웅하는 이도 없어 쓸쓸한 뒷모습이었을 것이다. 연통도 없이 왔으니 자업자득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어느덧 11월의 마지막 주라는 사실이었다. 이번 주만 지나면 올해의 마지막 달,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최후의 달에 접어든다. 첫눈까지 내렸으니 겨울은 더 이상 눈치 보지 않고 길 위로 밀려들어올 것이다. 가을은 이미 문지방 너머로 한 발을 내디뎠다.

  

  출근길 회사원들의 고단한 런웨이에는 어느새 롱 패딩이 대세다. 패딩 기장은 작년이 재작년보다 한층 더 길었는데 올해는 정강이를 넘어 발목까지 덮을 기세다. 침낭을 뒤집어쓰고 다닐 날도 머지않았다. 겨울은 매년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으니 이를 반기던 반기지 않던 겨울을 맞는 마음가짐은 더욱 단단해져야 한다.

  


  02.

  2020년 다이어리도 받았다. 점심 저녁 할 것 없이 하나의 브랜드만 고집했더니 예상보다 빠르게 받을 수 있었다. 커피 17잔을 마신 보답, 호구의 트로피를 받아 드는 순간 강렬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다이어리 아래쪽에 새겨진 '2020'이 화근이었다. 올해를 순식간에 지나간 해로 바꿔버리는 저 낯선 숫자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2020. 이런.  

  


  03.

  괜찮을까? 

  뭐가?   

  

  이대로 새해를 덜컥 맞아버려도 되는 것인지, 2019년을 이대로 지나 보내고 2020년이라는 생소한 해와 친목을 다져도 좋은지. 

  

  언제는 괜찮았니?

  응? 

  언제는 충분히 준비하고 새해를 맞았느냐고?

  아니. 아니지.

  


  04.

  조용하게 해를 마무리할 준비만 해도 시간이 부족한데 올해 연말은 왠지 많이 바쁠 것 같다. 물론 실제로 연말에 뛰어들어봐야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망년회를 갖자는 이야기도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있다. 

  

  망년회를 송년회로 바꿔 불러야 한다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있었고 지금도 간간히 흘러나오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망년을 송년으로 바꿔 부른 들, 해를 '잊는 것'에서 '보내는 것'으로 의미의 전향이 이루어진 들, 본질은 결국 같으니까. 2019년은 시간의 뒤안길로 넘어가 망각의 무덤에 묻히게 될 것이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단 한 장의 달력이 넘어가는 순간 2019년은 왠지 고루하고 오래되고 맞지 않는 옷처럼, 빛바랜 사진처럼 느껴질 것이다. 사람들의 혀와 손 끝에서 2020이 익숙해지는 것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럼에도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2019년과 2020년의 사이에서 약간의 방황을 할 예정이다. 이미 지루해진 2019년과 아직 어색한 2020년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할 것이다. 올해에 남지도 못하고 새해로 넘어가지도 못한 채 송년의 문지방 위에서 당황하는 이들은 결국 술이 해결해줄 거라며 부어라 마셔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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