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에는 영화 <헤어질 결심>에 대한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 어디까지나 영화의 만듦새에 대한 평론이 아닌, 영화에서 다루는 ‘경찰’의 모습에 대해 해학적 시각으로 써 내려간 글이니 가볍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요
2022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영화이자, 박찬욱 감독이 '한국 영화에 굴러 들어온 복'이라고 칭한 배우 탕웨이의 출연작이다.
스토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암벽 등반을 하다 추락해 사망한 변사 사건을 맡게 된 부산서부경찰서 형사팀장 해준(박해일 배우)과, 남편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용의자 서래(탕웨이 배우). 서래의 살해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그를 조사하며 주변을 배회하던 해준은 자신도 모르게 서래에게 빠져드는 걸 느낀다.
용의자와 사랑에 빠진 형사라.
클리셰처럼 느껴지는 이 설정을, 박찬욱이라면 어떻게 풀어냈을까. 미장센의 대가인 박찬욱 감독이 그려내는 경찰관은 어떤 모습일까.
영화에 등장하는 해준의 사무실이다. 세상에... 어느 경찰서 팀장의 사무실이 이렇답니까. 그것도 형사/강력계에서. 이 장면이 나올 때 정말 내면의 소리를 질렀다. 나도 일하고 싶다. 여기서 일하고 싶어...!
그래도 박찬욱 감독의 미장센에 대한 집착과 그의 전작을 비교해 보면 나름 현실과 타협한 수준에서 최대로 색감을 끌어올린 것 같다.
만약 이 세트장에서 리얼리티를 조금만 더 보태보자면,
1. 컴퓨터가 있어야 한다. 팀장님은 보통 더블 모니터를 쓰는 특권을 누리기 때문에 모니터는 두 개를 나란히 붙이는 게 좋다. 참고로 모니터의 크기는 22인치를 넘어선 안 되며, 삼성이나 LG보다는 대우루컴즈나 주연테크의 로고가 박혀야 한다. 모니터 밑엔 최소 2천 쪽 이상의 법전을 두어야 금상첨화.
2. 경찰서 로고가 찍힌 낡은 나무 연필꽂이에 접이식 효자손이 꽂혀있어야 한다. 형사팀장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 자동차 열쇠에 구두주걱 키링을 다는 것도 잊지 말자.
3. 의자는 메시 커버로 되어 있고, 그 메시망 사이사이 알 수 없는 이물질이 잔뜩 끼어있어야 한다. 뒤로는 180도 가까이 젖혀져야 합격.
정말 공감하기 어려운 설정은 따로 있다. 사무실은 약과다. 바로 해준이 평소 입고 다니는 의상이다.
형사팀장님이 양복을...?
넥타이까지...?
아냐... 진짜 팀장님은 이렇지 않으셔...!
상의는 이렇게!
하의는 최소 2가지 이상의 색이 배열되어 있고 무한정 늘어나는 스판 재질로!
으악, 벌써 자장면을 3분 만에 다 드실 것만 같아!
진짜 형사는 여기 있네.
아이패드로 진술조서를 받는 형사라니?! 거기 보안은 깔린 건가요? 애초에 공식적인 프로그램이 설치된 정부 사용 컴퓨터가 아니라 개인 기기로 받는 조서의 신빙성은 어떻게 인정받죠?
서래가 변호사만 고용했어도 바로 석방될 일이었네. <고용할 결심>...
이외에도 서래와 해준의 관계에서 중요한 장치로 작용하는 건 스시다. 영화에선 시마스시의 모둠 스시로 나오는 음식. 실제 상황이었다면 서래는 꼼짝없이 홍콩반점 행이다. 형사팀장님은 초밥 같은 거, 잘 안 드신다.
용의자에게 딱 봐도 비싸 보이는 모둠 스시를 사주자, 해준의 후배 형사인 수완(고경표 배우)이 묻는다.
저거 경비 처리돼?
절대 안 되지. 한참 전에 한도 초과니까.
박봉의 공무원이 용의자에게 경비 처리도 되지 않는 고가의 음식을 사비로 제공한다.
이리 봐도 모로 봐도 벌써 사랑이다.
서래와의 첫 대면에서 스시를 사주는 장면이 유난히 마음에 들어왔던 건,
나 역시 파출소에 처음 발령받았던 날 조장님이 모둠 스시를 사주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막힌 우연이 있단 말인가?
2016년에 찍은 사진이다.
경찰관으로서, 파출소에 처음 출근하던 날. 딱딱하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던 조장님은 근처 스시집에 가서 예약하시더니, 점심시간에 주문해 둔 모둠 스시를 받아오셨다. 당시 한 팩에 2만 원으로, 팀장님 포함 7명이었던 걸 생각해 보면 14만원이라는 거금을 쓰신 거다.
팀장님도 화들짝 놀라면서 우리 몰래 복권에 당첨이라도 됐냐고, 원도한테 귀한 대접한다고 하셨던 기억이 새록새록이다.
물론 이렇게 널찍한 상에서 우아하게 곱씹을 여유는 없었다.
회의 겸 진술조서 작성 겸 민원인 응대 겸 식사 겸 휴식 겸겸겸겸...
아주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는 테이블 위에 신문지를 깔고 먹었다. 당시 선배님들의 얼굴은 최대한 가렸다. ^^;
언제 신고가 들어올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해치워야하는 외근 경찰관의 식사란.
14만 원이 증발하기까지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땐 정말 잘 먹었어요, 조장님!
사실 이 글을 쓰기까지 많이 망설였다. 애초에 이 연재의 취지는 영화의 만듦새와 상관 없이, 현실과 맞지 않는 경찰관의 모습을 포착해 같이 웃어넘기자는 것이지만. 그렇게 단순히 다루기에 <헤어질 결심>은 너무도 아름다운 영화였으니까. 고결한 감정에 유머라는 이름으로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개 형사인 수완(고경표 배우)이 경찰서장 앞에서 술에 만취하여 행패를 부려도,
만취 후 용의자의 집에 찾아가도(실제였다면 [만취한 형사, 용의자 집 들어가 행패] 따위의 기사로 언론에 도배),
형사팀장님에게서 박봉의 공무원이 뿜어내는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도(부인이 돈을 잘 벌어서 그런가?),
최연소 경감이라는 수상한 설정이 붙어 있어도,
그런 걸 모두 무시할 만큼 영화가 참 아름다웠다.
사실, 나도 그런 경찰관이 되고 싶었다.
사무 환경이 예쁘진 않아도 최소한의 청결은 보장되기를.
공무원의 월급이 현실적인 수준에 맞게 인상되어서 드라이클리닝 비용 걱정 없이 깔끔한 양복을 입고 출퇴근하기를.
급박한 상황일 경우 경찰관에 필요 최소 한도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총기를 사용할 수 있고, 그에 대한 법의 보호를 받기를.
정당히 번 돈으로 모둠스시 정도는 무리 없이 사먹을 수 있기를.
무엇보다,
삶이 사랑으로 빛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