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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화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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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mille Nov 06. 2024

영화<박하사탕>비평

영원과 약속에 대해

출처:kmdb
들판에서 햇빛을 맞으며 삶을 찬미하던 청년 영호는 어떻게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되었는가.

영화 <박하사탕>은 열차에 뛰어들어 삶을 스스로 끝내려는 영호라는 인물의 인생을 거꾸로 보여주는 이야기다.

철로를 달리는 열차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떨어지던 꽃잎이 나무에 들러붙고, 길거리의 자동차는 거꾸로 움직인다. 열차의 시간이 거꾸로 흐르며 동시에 영호의 시간도 거꾸로 흐른다.


그가 철로에 달려들기 사흘 전, 영호는 사비를 털어 권총을 구매한다. 원한을 품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격발을 시도하지만 영호는 그 누구도 죽이지 못한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말이다. 그렇게 누구도 죽이지 못한 영호는 좌절하며 철교 밑 비닐하우스,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다.


그런 영호에게 누군가 찾아온다. 난데없는 불청객에 영호는 권총을 겨누며 자신의 계획을 설명한다. 그리고 자기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고 격발 하려던 찰나 뜻밖의 얘기를 듣는다. 윤순임이라는 여자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 영호를 찾아온 사람은 순임의 남편이었고 순임은 영호의 첫사랑이었다.


수십 년이 지나 만난 순임은 인공호흡기를 달고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영호는 순임의 병문안 선물로 박하사탕 한 통을 사간다. 그리고 순임에게 말한다. 그녀가 선물한 박하사탕을 사실 모으고 있었다고. 물론 이는 거짓말이었다. 순임은 영호가 군대에 복무하던 시절, 자기 공장에서 만든 박하사탕을 하나씩 보냈고 영호는 이를 반합통에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긴급 출동을 하던 중 반합이 쏟아지고 순임이 보낸 새하얀 박하사탕은 군인들의 군홧발에 무참히 밟혀버린다. 그날 이후 영호의 인생은 심각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박하사탕은 시대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개인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집중적으로 조망한다. 순하기 그지없던 청년 영호는 군 제대 이후 경찰에 들어가며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고 순수함을 상실한다. 그리고 종국엔 달려오는 열차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그를 달려오는 열차에 몸을 던지게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영호는 권총의 총구를 누구를 향해 겨눴어야 하는가?


시간은 흐르고 동시에 변한다. 영원한 건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영원함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너무 쉽게 영원을 약속한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친구에게, 동료에게 영원을 약속한다.


영원이 허상이라면 영원의 약속은 과연 유효할까?

약속할 수 없는 것을 약속했다면 우리에게 그 약속을 지킬 의무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영호는 격변하는 시대 상황 속에 자신의 순수함을 상실한다. 이야기의 끝이자 영호의 오랜 과거 속에 그 청년은 들판에 누워 영원히 자신을 비출 줄 알았던 햇빛을 느낀다. 그러나 밤이 찾아오고 먹구름이 끼고 비가 내리며 영호는 흠뻑 젖는다. 이는 시대의 소용돌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영호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연출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영호도 순수하고 지고지순한 자신의 마음이 영원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거대한 시대의 소용돌이 앞에 개인은 무력할 뿐이었다.


자신의 손이 더러운 오물로 더럽혀졌을 때, 영호는 자신을 찾아온 첫사랑 앞에서 홍자를 성추행하며 자신이 타락했음을 암시하고 이별을 선언한다. 시대의 흐름 앞에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은 순간 영호는 절망했고 그에 대한 반항으로 점점 타락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영호를 향한 순임의 사랑은 변치 않았다. 순임은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는 순간에도 영호를 잊지 않았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은 지킬 의무가 있는가? 영호와 순임의 답은 서로 달랐다. 영호는 자신의 무기력함을 깨닫는 순간 그 의무를 저버렸다. 그러나 순임은 영호와 나눈 무언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고자 노력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순임은 수명이 다하기 전 다시 영호를 만나 재회의 눈물을 흘리지만 지키지 못한 영호는 달려오는 열차에 자신의 몸을 던지는 일 밖에 할 수 없었다.


이 영화는 시대의 소용돌이 앞에 무기력한 인간을 보여줌과 동시에 인간과 인간 사이 쉽게 맺어지는 영원에 대한 약속을 조망한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지킬 수 없는 약속도 지킬 의무가 있는가? 확실한 대답을 주진 않지만 서로 다른 선택을 했던 순임과 영호의 최후를 통해 우리는 그 답을 어림 짐작할 수 있다.


다소 어두운 내용이지만 이 영화는 한 가지 희망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순수함이라는 가치만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시대가 흘러 사람이 변해도 순수함이라는 가치는 영원하다. 만일 변한 영호에게 순수함이 조금이라도 남지 않았다면 영호는 죄책감을 느끼며 열차에 몸을 던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호는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순수함이라는 영원한 가치의 존재 증명을 해낸 것이다.


시대는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 하지만 순수한 그때의 마음만큼은 변치 않는다. 격변하는 시대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우리가 순수했던 시절의 기억만큼은 잊어선 안된다. 비록 박하사탕이 군홧발에 짓밟히고 자기 손에 오물을 묻히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가치를 우린 이 영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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