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구기 와 티옹오, 『한 톨의 밀알』
저는 여전히 고해소 앞에 서 있을 때 작은 떨림을 느낍니다. 지은 죄에 대한 부끄러움이면서, 하느님 심판에 대한 두려움, 내 죄를 들어줄 사제의 반응, 영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여러 감정이 교차하며 떨립니다. 그것이 심할 때는 애써 찾아간 고해소 앞에서 다음 기회에 하자며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돌릴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작은 용기를 내어 고해성사를 보는 것은 죄의식으로부터의 해방감이 주는 기쁨 때문일 것입니다.
타인을 용서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상대에 대한 분노로 잠식된 마음은 쉬이 놓이질 않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하시니, 이 말씀이 야속하게 들릴 때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타인을 용서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있다면 자기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고 또 고백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 내가 받을 비난에 대한 두려움, 내 잘못이 발각되었을 때 실추될 내 명예와 자존심. 이러한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하다 보면 내 죄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리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 알지만 않는다면, 나조차도 쳐다보지 않는 것이 훨씬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물론 여기에도 문제가 따르는데, 감추어둔 잘못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마다 마음은 무거워지고, 행동에도 자신감이 없어지기도 합니다.
간혹 누군가는 모두가 그의 죄를 다 아는데도 거리낌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양심의 가책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마음속 그늘을 모른 채 살아간다는 게 행복한 삶일까요. 아니면 자기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알며, 겸허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새로 태어나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삶이 행복한 삶일까요.
이번에 함께 나눌 책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또 그것을 고백할 수 있는 용기가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속삭여주는 책입니다. 아프리카의 대표 작가 응구기 와 티옹오(Ngũgĩ wa Thiong’o, 1938~ )의 『한 톨의 밀알』이라는 작품입니다.
『한 톨의 밀알』 작가 응구기 와 티옹오는 케냐를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나아가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소설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케냐 출신의 그는 우간다와 영국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며 소설가로서의 기질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는 탈식민주의 문학의 거장이 되어 현재까지 식민지배 시기 전, 후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많은 소설을 집필했습니다. 그의 많은 작품은 식민지배의 불의를 고발하고 민중의 삶의 슬픔과 고통, 애환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또한 식민지배 이후에도 남아있는 식민 유산의 부패와 탐욕을 청산해야 한다는 주제의식을 담아내기도 했지요. 이러한 그의 많은 작품들은 다양한 문학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등, 세계적으로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지난 2016년에는 박경리 문학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어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이때 이와 관련한 국내 기사를 읽은 계기로 응구기 와 티옹오라는 케냐 출신 작가를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작품 중 1967년 출간된 『한 톨의 밀알』은 응구기 와 티옹오라는 작가를 세계에 알린 작품이자, 그의 문학성과 문학사상을 집약적으로 담아 놓은 작품으로 꼽힙니다. 케냐는 1895년부터 1963년까지 영국으로부터 혹독한 식민 지배를 받고, 케냐 국민들의 오랜 투쟁 끝에 1963년 12월 12일 독립을 쟁취합니다. 이 독립일을 기점으로 하여 이전의 사건들을 회고하는 것이 『한 톨의 밀알』이라는 작품의 시간적 배경입니다.
『한 톨의 밀알』이라는 제목은 제목부터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떠오르게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소설 『한 톨의 밀알』은 이 성경 구절대로 지금 순간의 고통과 어려움이 마지막 순간엔 기쁨과 새로운 희망으로 점철될 수 있다는 기대를 모티프로 삼고 있습니다. 식민 통치 기간에 겪은 온갖 사회적 불의와 폭력, 더불어 각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번민. 작가는 이 과정이 단순히 잊고 묻어버려야 할 시간이 아니라, 이 과정을 내면화하고 독립을 맞이했을 때 비로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전합니다.
또한 이 소설에서 희망의 주체는 소수의 지도자가 아니라 그 시기를 겪어낸 수많은 민중입니다. 각 개개인이 식민 통치라는 역사 안에서 어떤 불의를 겪었고, 어떤 결정을 내렸으며, 자의든, 타의든 자신에게 새겨진 상처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해 조명합니다. 주인공들 역시 역사적으로 굵직굵직한 선을 남긴 위인이 아니라 주변부에 있는 민중이자 역사에 휩쓸리는 개인들입니다.
이 소설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케냐 독립일, 1963년 12월 12일의 나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다양한 인물들의 고뇌와 번민을 그려냅니다. 각 인물들은 자신만의 어두운 과거를 갖고 있습니다. 어두운 과거는 곧 그들의 죄의식이기도 했습니다.
소설 속 ‘무고’라는 인물은 마우마우(독립) 운동의 지도자 키히카를 배신했는데, 이것이 잘못 알려져 오히려 독립운동가 키히카를 피신시켜준 독립영웅이 되어버립니다. 그의 지인 ‘기코뇨’는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수용소에 들어가지만 가족과 아내 ‘뭄비’가 그리워 조직을 배신하고 수용소에서 풀려납니다. ‘뭄비’는 ‘기코뇨’의 아내로서 수용소에 들어간 ‘기코뇨’를 기다리지만 한 순간의 실수로 ‘카란자’의 아이를 갖게 됩니다. 여기서 ‘카란자’는 우리나라로 말하면 전형적인 친일파와 같은 인물로, 영국인들 밑에서 하급관리를 하며 케냐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찍혀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인물들이 이 소설의 주축을 이루는데 모두 자신들을 꾸역꾸역 밀어내는 역사의 힘 앞에서 무기력 채 배반 행위를 하고 맙니다. 그들의 배반 행위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죄의식에 몸부림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한 톨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상황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자기 성찰과 속죄를 하고 다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한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어냅니다. 그러면서 다가오는 새 삶을 희망합니다.
소설 초반부엔 영국 식민 지배의 잔혹함과 흑인들이 받는 고통과 핍박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마우마우 운동의 지도자 키히카는 배신자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당했는데, 그가 가지고 있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그가 백성 가운데 가련한 이들의 권리를 보살피고 불쌍한 이들에게 도움을 베풀며 폭행하는 자를 쳐부수게 하소서.(시편 72,4)
그는 약한 이와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줍니다.(시편 72,13) 43p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할 강력한 지도자상을 기억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이 구절에 밑줄이 쳐진 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키히카의 지도력을 그리워하고, 그에 대한 존경심을 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키히카의 성경을 들고 무고에게 찾아가 밑줄 그어진 구절을 보여줍니다. 그에게 독립을 하는 날 당일, 독립기념행사에서 키히카에 대한 연설을 해주길 부탁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무고가 키히카를 숨겨주고 피신시켜준 사람이라고만 철썩 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무고는 자신이 키히카를 배신했음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처음엔 그 연설을 거부했지만 계속되는 사람들의 부탁에 다음과 같은 생각에까지 이릅니다.
‘그분이 곤궁한 자들의 아이들을 구할 것이니라.’
그 사람은 자신임에 틀림없었다. 기투아와 노파 같은 사람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할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을 하자! 그래, 우후루(독립) 기념식에서 연설을 하자.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를 잊고 감사하는 마음이 되게 하자. 아무도 키히카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다. 하느님께 선택된 자는 과거를 용서받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위대한 행위를 통해 깨끗해지는 거야. 야곱과 에사우가 살았던 시절에도 그러했으며, 모세가 살았던 시절에도 그러했어.’ 199p
이렇게 무고는 자신의 죄를 덮을 달콤한 유혹을 느낍니다. 우리 보통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주 부끄러운 죄를 덮을 만한 방법이 눈앞에 떡 하니 놓여있는데 이것을 거부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물론 나중에 그 일이 나중에 알려질까 조마조마하겠지만, 당장에 내 죄를 가려줄뿐더러, 민중의 영웅이 되는 길 앞에서 주저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하지만 무고는 이렇게 생각을 하고도 내면의 죄의식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또 다른 인물 기코뇨는 독립운동의 혐의로 수용소에 갔지만 가족과 아내가 그리워 조직을 배신하고 수용소에서 나온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토록 그리워했던 아내 뭄비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고 말았습니다. 아내 뭄비는 그저 바람을 핀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을 기다리고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어렵게 생활했으나, 식량을 얻으며 카란자라는 인물에게 범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기코뇨는 이 사실을 알려고 조차 하지 않았고, 그저 그녀에게 분노를 느끼며 상대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그의 사업을 하는 데만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조직을 배반하고, 아내를 용서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상념에 빠집니다.
나에게도 일찍이 소망하던 일이 이뤄졌다. 이제 어머니가 거처할 집도 생겼다. 땅도 조금 있고, 음식을 사기에 충분한 돈도 생겼다. 그런데 이제 돈도 기쁨을 주지 않고, 부(富)라는 것도 쓰디쓴 물맛이 날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돈을 계속 더 벌어야 한다…. 260p
죄의식을 극복하지 못한 안타까운 인물의 모습을 기코뇨를 통해 보게 됩니다. 외적인 것을 갖춰도 내면을 잠식한 죄의식은 결국 많은 것들에 대해 ‘쓰디쓴 물맛’을 느낍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며 ‘쓰디쓴 물맛’을 느낄 수는 양심이 고맙고, 깨어있는 양심이야 말로 변화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새롭게 느꼈습니다.
‘쓰디쓴 물맛’은 무딘 양심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자기 성찰과 속죄를 통해 ‘쓰디쓴 물맛’을 느낀다는 것은 나를 인간으로 살아가게 할, 나를 성장시키게 할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쓰디쓴 맛이 아니라, 진정으로 나의 갈증을 해소시켜 줄 그 물. 그 물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며, 나 자신과 화해할 때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요한 4,14)의 의미를 양심의 의미에서 성찰해보게 됩니다.
『한 톨의 밀알』에서 나오는 인물들은 이처럼 각자의 죄의식 때문에 힘들어하고, 번민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웃을 보고, 또 자기 자신을 성찰하며 그 죄의식에서 벗어납니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선 독립운동 지도자 키히카의 성경에 다음과 같은 부분에도 밑줄이 그어져 있음이 드러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앞서 시편에서 밑줄이 그어진 내용처럼 강한 지도자, 인간적 승리를 예고하는 내용과는 결이 다릅니다. 소설 속 인물들은 더 큰 열매를 맺기 위해 자신의 과오를 받아들이고 마침내는 그것을 고백합니다. 자기 자신의 죄를 만인 앞에서 공표하여 붙잡혀가는 상황에까지 이르지만 종국엔 주변 사람을 용서하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기도 합니다. 아주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그 과정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케냐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1963년의 4년 뒤, 1967년에 출간되었습니다. 작가는 이미 케냐의 독립을 보았지만, 여전히 사회 곳곳에 남아있는 식민주의의 잔재라든지, 공동체의 분열도 마주했을 것입니다. 작가는 이러한 민중의 모습을 보며 『한 톨의 밀알』을 통해 독립 이후의 케냐의 구성원들도 서로의 속죄와 용서를 통해 화합하자는 의지를 보여줬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아프리카 케냐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을 통해 우리는 다소 낯선 아프리카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식민 지배를 받은 우리나라 사람이 읽기에 정서적인 이질감은 크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식민지배의 폭력과 각 개인이 지닌 고통과 번뇌에 독자의 감정을 이입시키기에 어렵지 않은 이유는 역사를 우리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책에서 묘사되고 있는 아프리카의 대지, 태양, 농지, 흙, 나무와 잎사귀들을 상상하고 그려보며 읽는 것도 이 소설의 큰 재미입니다. 다분히 이질적이면서도 따뜻하고 고즈넉한 배경이 즐거움을 줍니다. 더불어 케냐 언어인 스와힐리어를 한글로 옮겨놓은 시와 기도들을 읽어보는 것도 독특한 감상을 자아내게 합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죄의식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는지, 죄의식을 극복한 이에게 새로운 희망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또한 인간이 질척거리는 진흙탕 같은 죄의식에서 발버둥 치며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은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희망의 속삭임을 듣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속죄이자 참회, 그리고 고백의 과정을 통해서 말이지요. 자기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나 자신 스스로와, 주변에 있는 이웃과, 그리고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 이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자유로움과 희망을 주는 것인지를 『한 톨의 밀알』을 통해 함께 느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