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엔 반 투안,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
故 신영복(1941~2016) 선생께는 ‘우리시대의 스승’, ‘참 의미의 지식인’과 같은 수식어가 붙지요. 기구하고도 드라마틱한 삶에서 비롯되는 그분의 성찰과 사유들이 많은 현대인의 가슴을 울립니다. 신영복 선생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이후 1988년까지 20년 20일이라는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20년이라는 긴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며 쓰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많은 이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1988년 사면복권 되시어 이후 쓰신 책들,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 『강의』, 『담론』과 같은 저서들을 통해 당신의 사유체계와 의식세계를 정리하고 발표하셨습니다.
그분의 글을 읽다보면 그 가운데엔 인간에 대한 애정과 따뜻함이 관통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서로의 관계와 연대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기도 하고요. 갑갑한 옥살이에 대한 분노나 인간존재에 관한 회의(懷疑)가 아닌,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불의한 세계를 목격하고 체험하면서도 인간과 세계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놓치지 않는 신영복 선생의 성찰에 절로 탄복하게 됩니다.
특히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그의 억중서간에선 세상과 괴리되고 자유가 철저히 통제된 감옥에서 오히려 인간과의 관계, 유대를 강조하는 역설적인 사유가 사뭇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저 같은 경우, 삶의 무게에 짓눌려 숨쉬기 어려울 때면 이따금씩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뒤적이곤 합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순간마저도 꿋꿋이 희망을 찾아나서는 모습에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선생은 감옥에서 “요즘은 춥도, 덥도 않아 징역살기에도 가장 좋을 때입니다.”(150p)라며 냉혹한 현실에서도 긍정성을 찾으며 인간의 온기를 잃지 않으려 했습니다. 또한 “한 방에서 숨길 것도 내세울 것도 없이 바짝 몸 비비며 살아가는 징역살이는 사회, 역사의식을 배우는 훌륭한 교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220p)라며, 많은 것들이 박탈된 공간까지도 당신의 교실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이토록 이분이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 이유는 당신 스스로의 끊임없는 성찰과 사유, 인간 정신의 정진을 위한 불굴의 노력 덕분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엄혹한 현실 안에서 오히려 인간정신은 날카로워진다는 말이 있던가요.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도 박해와 탄압의 순간에 참된 신앙의 의미가 빛났다는 것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로마에 의해 박해받던 초대교회 사도들은 박해와 순교 가운데서도 신앙을 증거 했습니다. 천주교가 조선시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도 박해로 인해 수없이 많은 신앙인들은 고통을 받았습니다만 그러한 현실 안에서 오히려 신앙의 꽃을 피웠습니다. 이후 북녘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을 때도 종교의 자유는 탄압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역사는 끊임없는 박해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오히려 그 안에서 믿음과 사랑, 그리고 희망을 증거하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1975년, 베트남이 완전히 공산화 된 이후엔 종교의 자유가 억압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천주교인들이 감옥에 끌려가거나 노동형에 처해지게 되었고요. 이번에 함께 나눌 책은 그 당시 체포되어 13년간 옥살이를 하신 베트남 출신의 추기경,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구엔 반 투안(F.X, Nguyen Van Thuan, 1928~2002)의 저서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는 구엔 반 투안 추기경의 13년간 수감생활에 대한 묵상집이자, 2000년 대희년을 맞아 교황청에서 있었던 사순절 피정의 강의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구엔 반 투안 추기경은 1928년, 베트남에서 오랜 역사를 거치며 가톨릭 전통을 지니고 있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53년 사제서품을 받고 이후 로마에서 교회법을 수학하고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베트남에 귀국해서 신학교의 교수로, 이후엔 신학교 교장과 교구 총대리를 거쳐 1967년 나트랑의 주교로 서품됩니다. 사목적으로 성공한 성직자라고 칭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 투안 추기경은 이러한 자신의 사목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述懷)합니다.
“1957년 로마에서 공부할 때, 저는 성모님께 기도하기 위해 루르드에 갔습니다. 그 작은 동굴에서 저는 성모님이 성 벨라뎃다에게 하신 ‘나는 너에게 이 지상에서 기쁨과 위로가 아니라 시험과 시련을 약속한다.’는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 어쩌면 제 사목적 직무는 성공으로 장식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해마다 저는 루르드를 방문했고 종종 의구심을 품기도 했습니다. ‘성 벨라뎃다에게 하신 말씀이 내게 해당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1975년이 되자 저는 성모 승천 대축일에 체포되어 수감, 격리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저는 성모님이 1957년부터 저를 준비시키셨음을 깨달았습니다.“ 258p
1975년 북베트남의 공산정권이 사이공(현재의 호치민)을 점령하고 베트남 전체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가톨릭의 고위 성직자이자 지도자였던 반 투안 추기경은 1975년 8월 15일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이후 13년간 옥고를 치릅니다.
그는 1988년 석방 뒤에도 가택연금이 되어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1992년에는 베트남에서 추방되어 로마에서 살게 됩니다. 이후 그는 교황청에서 일을 하고 다양한 강의와 피정지도를 하며 감옥에서 보냈던 체험을 바탕으로 희망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2001년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었습니다. 이듬해 2002년에 반 투안 추기경은 다시 베트남으로 향하지 못한 채 향년 74세의 나이로 로마에서 선종했습니다.
반 투안 추기경은 공산주의 정권 아래 그리스도교의 박해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가톨릭 서점은 모두 철거되었고 학교는 문을 닫았습니다. 수녀와 수사들은 흩어졌습니다. 어떤 이들은 쌀 농장으로 일하러 갔고 어떤 이들은 백성 한가운데 또는 마을 가운데 ‘새로운 경제 지역’에서 거주했습니다. 이와 같은 이별은 가슴을 짓누르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80p
또한
그날들과 그 달들 안에서 뒤엉킨 수많은 감정, 곧 서글픔과 두려움과 긴장이 정신을 초조하게 만들었습니다. 제 마음은 사람들과 떨어져 있어 찢어지듯 아팠습니다. 74p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겪는 두려움과 초조함 앞에서도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도 안타까워했습니다.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막연함은 더욱더 그를 좌절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의 가치가 철저히 짓밟힌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깨어 있으려 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느님께 묻던 그는 다음과 같은 다짐을 합니다.
“감옥에서 수많은 밤을 보내면서 성덕에 이르는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길은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 확신에서 이러한 기도가 나왔습니다. ‘예수님, 이제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사랑으로 채우면서 살겠습니다. … 더욱 완벽하게 순간순간을 산다면 제 삶은 거룩해질 것입니다.” 75p
반 투안 추기경의 이 말씀에 불만족스런 현실을 꾸역꾸역 밀어내려고만 하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삶에 대한 만족과 불만족이라는 모호한 기준을 스스로 세워놓고 뭔가 부족함을 느낄 때면 답답해합니다. 내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웠을 때는 삐딱한 시선으로 현실을 바라봅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점점 내면을 잠식해갑니다. 희망보다는 절망이, 즐거움보다는 우울함이 마음속에 자리합니다. 타인과의 관계나 연대와 같은 긍정적인 의식도 희미해져가고요.
하지만 반 투안 추기경은 그런 어두운 순간에 ‘사랑’을 떠올립니다. 잿빛인 현실을 사랑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랑으로 채운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무엇보다 그는 감옥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겨우 얻은 나무로 작은 십자가를 만들어 보관하기도 했고, 종이조각을 모아 자신이 기억하는 성경구절을 빼곡하게 적어 기도를 바치기도 했습니다. 동료 수감자들에게는 위로의 말을 건넸으며 심지어 감시인들에게도 다양한 언어와 성가를 가르쳐주며 신망을 얻었습니다. 감시인을 바꾸면 바꿀수록 그들이 반 투안 추기경에게 감화되어 결국엔 감시인을 바꾸지 않는 상황에까지 이르기도 했습니다.
반 투안 추기경은 자신이 십자가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끊임없이 주변에 ‘사랑’이라는 ‘희망’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는 성경의 사도 바오로의 말씀,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2)라는 구절을 묵상하며 자신의 감옥 생활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제가 어려 해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하더라도 제게 만일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이 없다면 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했듯이 모든 것은 에너지 낭비일 뿐입니다. 94~95p
인간존재와 삶의 목적이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보게 해주는 말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비단 감옥 생활만이 비참할까요? 사랑 없이 자유가 보장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마냥 행복하기만 할까요? 삶의 본질적인 의미란 사랑에서 비로소 빛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장소와 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는 자리에 풍요로움이 함께 할 것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인간 사이에 작은 관계조차 소중히 여기고, 아주 사소한 것에 감사를 느끼는 그 순간 다가오는 행복감이야말로 사랑이 시작하는 자리일 것입니다. 비극의 순간은 홀로 내쳐진 채 온갖 것으로부터 나를 가두는 행위에서 시작합니다. 비참한 현실에 자신의 마음을 열 용기가 도무지 나지도 않고요.
그럴 때 일수록 차분한 마음으로 내게 주어진 감사한 것들은 무엇인지, 또 이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일지 곱씹어 본다면 작은 희망의 불씨가 생겨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를 읽고 제게 가장 감명 깊게 남은 장면은 감옥 안에서 반 투안 추기경이 미사를 봉헌하는 장면입니다. 그는 소량의 포도주를 자신의 위장약으로 쓸 것이라 말하고 그것을 구합니다. 그리고 비참하고 악취 나는 감옥이라는 공간을 가장 거룩한 성당과 제대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때 느꼈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세 방울의 포도주와 한 방울의 물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미사를 거행했습니다. 이것이 저의 제대였고 주교좌성당이었습니다. …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저는 예수님과 함께 손을 펼치고 십자가에 저를 못 박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그분과 함께 가장 쓴 잔을 마셨습니다. … 제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사였습니다. 174p
비참과 절망으로 얼룩진 한 칸의 좁은 감옥이 거룩한 제대와 성당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제대로 구비된 것이 없었지만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잔이 빛났습니다. 반 투안 추기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십자가 처형 앞에서 쓰디쓴 잔을 함께 마셨습니다. 비극 안에서 신앙이 빛났습니다.
비극적인 현실을 거룩함과 희망으로 바꾸는 힘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인간적으로 의지할 곳 없는 절망 속에서 다시 일어서려 하는 신앙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요.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 안에서도 한 인간으로, 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은 결국 사랑을 행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거룩해지려는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가장 비참하다고 여겨지는 순간마저도 거룩한 순간으로 바꿀 수 있는 신앙의 힘이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자리 하길 바래봅니다.
반 투안 추기경은 자신이 감옥에서 썼던 글을 소개하며 사람 사이의 친교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말합니다.
친교는 순간순간 전투를 치르는 것이다. 한순간의 방심으로도 친교는 파괴될 수 있다. 사소한 것으로도 충분하다. 사랑 없이 행하는 단순한 생각만으로도, 완고한 보수적 판단으로도, 감성적 집착으로도, 잘못된 방향 설정으로도, 야망이나 개인적 관심으로도, 주님이 아닌 내 자신을 위한 행동만으로도 파괴될 수 있다. ‘주님, 제 자신을 성찰하도록 도와주소서.’ 내 삶의 중심은 무엇인가? 주님인가, 나인가? 만일 주님이라면 주님은 우리를 하나로 모을 것이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며 실망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이는 내가 삶의 중심에 자신을 놓았다는 표징이다. 214~215p
그의 감옥 생활은 무척이나 열악했을 것입니다. 흙으로 된 바닥은 질척거렸을 것이고, 엄청난 더위와 습기는 주변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 짜증이 났을 것입니다. 온갖 악취와 더러움, 비참함 안에서 ‘친교’를 생각하는 반 투안 추기경의 성찰이 놀랍습니다.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설 수밖에 없는 조건 안에서 이웃과의 친교라니, 이런 성찰의 힘이 어디서 나올 수 있는 것일까요.
반 투안 추기경은 친교에 대해 ‘순간순간 전투를 치르는 것’이며, ‘한순간의 방심으로도 친교는 파괴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웃과의 친교를 위해 끊임없이 깨어있는 삶의 태도가 요구된다는 것이지요.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와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도무지 그 무엇도 나눌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의 상황에서도 친교를 나누려고 하는 마음을 배우고 싶습니다. 사랑의 다짐을 하며 친교가 시작되고, 친교를 통해 다시금 사랑에 대한 확신을 얻을 때, 내면 안에서 긍정적인 순환이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구엔 반 투안 추기경의 저서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를 통해 주어진 현실을 긍정하고 나아가 희망으로 바꾸는 힘을 배웁니다.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파고들면서도 이웃에 대해서는 넉넉한 마음을 잃지 않는 반 투안 추기경의 모습을 마음에 새깁니다. 어렵고, 절망스러우며,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점철된 현실 안에서 신앙을 통해 희망을 얻는 모습을 배우고 싶습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 아름다운 덕(德)이 한 인간을 통해 어떻게 향기를 내는지 반 투엔 추기경의 삶에서 찾게 됩니다. 반 투안 추기경님의 말씀으로 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현실(생로병사)을 기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현실을 생각하지 않으며 멀리합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한테 이러한 현실도 사랑입니다. 인생의 다른 모든 순간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고통스럽거나 기쁘거나 상관없이 우리는 사랑 안에서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26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