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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로등 Jun 10. 2022

소울리스좌

신문으로부터

오늘 자 중앙일보의 분수대 칼럼의 제목이다. 


이런 단어는 또 처음 들어본다. 단어의 설명만 보고 대충 어떤 건지 감을 잡고, 글에서 언급하는 '김한나'님의 유튜브 영상을 찾아봤다. 

별로 소울 없어 보이지 않는데? 오히려  영상을 보다 보니 '아마존 익스프레스'라는 것을 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과 시간, 노력까지 들여서 놀이기구를 타지는 않는 스타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소울 리스 좌.


영혼이 없다? 내가 보기에 영상 속의 한나 님은 영혼이 있어 보이는데. 그것도 완전히 체화된 숙련자의 모습이다. 단순히 반복적인 말을 쉴 새 없이 유창하게 말하는 모습에 대해 큰 의식 없이 또는 노력 없어 보이는 눈빛이라서 그런 표현을 붙여놓았나 생각해본다. 




이 칼럼에서는 감정이나 체력을 전부 쏟지 않는다고 해서 프로페셔널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노동과 업무도 숙련된 기술로 최선을 다하는 자세면 된다고도 했다. 



이 대목에서 울컥했다.  모든 것을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야 나를 인정할 수 있다고 여겨왔던 내 모습이 겹쳤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나는  프로페셔널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나는 타인에 대한 인정 욕구가 크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나 자신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 정도로는 열심히 하는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내 안에서 끊임없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사실 그 목소리는 내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결국 나는 그 감시자에게 가스 라이팅 당해서 일을 안 하거나, 공부를 안 하거나, 책을 안 읽거나 혹은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모습의 언행을 안 할 때 자책감을 매번 느꼈고, 결국 그 쪼그라드는 감정의 대상이 내 주변의 타인에게까지 전이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마찬가지로 모든 일의 주도권을 타인이 갖고 있는 것처럼 여기니 말이다.


나를 수동적인 위치에 단단히 앉혀놓고, 상황이 문제라거나, 여건이 문제라거나, 타이밍도 문제이고, 그 사람도 문제라고 되뇐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편하긴 하다. 모든 것이 남 탓이고 나는 문제가 없다고 여기게 되니깐 말이다.  


문제는 이 위치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성장이라는 단어는 이런 삶에 자리를 잡을 수 없다. 마음 그릇이 커 지는 경험도 할 수가 없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어 일시에 이해의 폭과 깊이가 넓어질 때 느끼는 충만함도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오늘처럼 휴가를 쓰고 집에 있는 날이면 늘 불편해지던 마음도 사실은 내가 나에게 일을 쉬지 않음으로써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라고 강요해왔기 때문인 것 같다.  


내 안에는 감시자도 있고, 핑계를 대려는 존재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나를 돌아보고 깨달음을 얻는 존재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 모습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각자의 존재감을 당당히 드러냈으니 적어도 인정할 수는 있겠다. 


이제부터 가짜 열정일랑 우주로 보내버리고 내 삶의 소울리스좌가 되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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