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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로등 Feb 05. 2023

45년 11개월

며칠 후면 나는 46년을 살았다고 공문서에 기록될 것이다. 

말하자면 기억에 없는 처음 몇 년을 제외하면 40년가량의 삶을 살아온 것이다. 


기억에 생생한 - 그렇다고 여기는 - 일들도 있고 일부러 잊어버린 기억들도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떠오르는 것들도 있다. 이들을 모은다고 해서 내 삶이 재구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과거에서 무엇인가를 건져내려고 그물을 드리우고 기다리곤 한다. 


아직도 과거의 부정적인 일들에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넘어진 곳을 짚고 일어서야 하는 것이 내게 온전한 평온함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털썩 주저앉아 있는 나를 다독여 일으켜 세우고, 한 걸음 내딛게 하는 것도 내게는 서늘한 즐거움이다. 



엊그제 재활의학과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연골판에 염증이 생긴 것 같다. 할 수 있는 것은 네 가지 운동이다.' 

들어보니 지금의 통증으로는 걷는 것과 계단 오르기 밖에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처방받은 진통제를 먹어보니, 약하다. 이 정도로는 통증이 가시지 않는다. 나는 이 약이 몸 안에서 어떤 경로로 흡수되어 어떻게 통증을 가시게 하며 어떤 장기를 통해 운명을 다하고 몸 밖으로 빠져나올지를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내 통증에 이 약이 맞는지는 미리 알 수 없다. 수많은 전문가들의 경험과 그것을 정리해 놓은 지식들이 무용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다. 


대학생 때까지 키가 컸으니 그 후로 약 25년 정도 몸을 썼는데, 특별히 운동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신체활동을 싫어하지도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무릎이 이렇게 빨리 자연의 법칙을 알려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해서 당황스럽긴 했다. 


딱히 다친 적이 없으니 MRI를 찍는다 한들 원인이 뭐가 나올까 싶었지만, 나는 지금 이런 통증이 생기기에는 이른(!) 나이이므로 원인이 있다면 미리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MRI 통 안에 몸을 반쯤 넣은 채 백남준의 작품에 나오면 잘 어울릴 것 같은 사이버틱한 기계음을 들으며 한 3-40분 누워있는 경험은 새로웠다. 미리미리 건강을 챙기면 이런 점이 좋겠지. 의료에 대한 좋은 기억을 몇 개쯤 미리 갖고 있는 것 말이다. 


교수님은 X-ray와 MRI결과를 설명해 주시고 증상의 변화를 보면서 초음파 사진을 찍어가면서 통증의 원인을 찾으셨다. 의학적인 대화 중에 석회화가 잘되는 체질인 것 같다는 얘기도 나온다. 어딘가 석회가 또 쌓여있나 보다. 내가 생각하던 몸이 아니다. 내 인식 속에 존재하던 범위를 벗어나는 얘기다. 


알 수 없던 왼손 새끼손가락 첫마디가 굵어진 이유, 복부 초음파에서 밝게 빛나는 점은 결석이라고 보기에 가장 맞다는 건강검진 결과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냥 커피가 문제인가?라는 근거 없는 생각도 떠오르고..




요즘 랜돌프 네스와 조지 윌리엄스의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를 읽고 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290476


인간이 자연의 일부일 뿐임을 깨닫지만, 그 시선으로 인간 사회를 살아가려면 모든 것에 약간의 거리를 두는 편이 고민이 덜하다. 나 자신의 몸에 대해서도 그렇다. 


무엇을 근거로 내가 이 나이에도 작년처럼 또는 30대인 것처럼 몸에 대해 느낄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었을까? 다시 생각해 보니, 언젠가부터 맥주 한 캔 이상을 마시기 어렵고 음식을 아직 덜(!) 먹었는데도 배가 불러온다. 더 이상 많은 음식이 필요 없다고, 그것들을 소화시킬 수 없다는 신호였을까? 


4킬로미터가량을 걸어서 출근하고 나면 온몸에 그제야 온기가 돌며 워밍업 되는 나른한 느낌이 좋아지고, 푸시업이나 플랭크를 하면 몸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드는 것도 내 몸에 운동이 필요하다는 신호일까? 


게다가 더 이상의 육아책은 필요 없다고 생각해 오던 차에 독서광 후배가 강추해 준 육아책이 이토록 내게 와닿는다는 것은 마음 챙김 또한 절실하다는 신호일테니.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4962065


45년 11개월이라는 숫자가 단지 나이 듦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너무 거칠다. 

오늘 이 삶이 내게 주는 메시지들로 보이는 것들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이들을 통해서 다음 순간 내가 어떤 한 걸음을 내딛어야 하는지 알게 되는 것 또한 감사한 일이다. 


일요일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사부작거리다가, 경서의 'Wonder Why'의 음률 속에서 생각하고 글로 써내려 놓으며 깨닫는 이런 경험이 정말 좋다. 


https://www.youtube.com/watch?v=GQymP5ZZOW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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