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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로등 Jan 04. 2025

틈새(2)

12월은 성탄절이 있어서 미리 고백성사를 해야 하는데, 이리저리 바쁘다 보니 하지 않았다.


11월 말부터 연속 3주간 주말마다 3과목씩 시험이 있어서 공부도 해야 했고, 가족 여행도 다녀와야 했다. 어느새 성탄이 코 앞이었지만 어차피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터라 성당에도 가지 않았다.


그래도 돌아온 탕아라도 되는 게 낫지 싶어 연말에 미사를 드리러 갔더니, 1월 1일도 성모님을 기리는 대축일이라고 한다. 오랜만에 뵙는 신부님과 수녀님이 같이 간 중학생 아들에게 인사를 해 주시길래, 대축일 미사에 오겠다고 말씀드려 버렸다.


1월 1일 9시에 미사를 드리러 갔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성모님 대축일 이라고 하지만, 평소에 성모님에 대해서 큰 의미를 떠올리지는 않았었다. 지난해에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 존재의 근저에 신이라는 근본이 있음을 생각하곤 했지만, 성모님은 사람인데 대체 어떤 의미인지 잘 와닿지 않았었다.


그런데, 미사를 드리면서  성모님이  갑자기 엄마의 한 원형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처녀가 임신했다고, 그것도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얘기를 천사로부터 들었을 때 얼마나 황당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을까? 그런 아들을 집도 아닌 곳에서 마구간에서 낳았을 때 어떤 감사가 느껴질 수 있는 건지?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모욕당하고 지탄받고 처참하게 젊은 나이에 죽어가는 아들을 겪는 마음은 또 어땠을까?


그런데, 성경에 따르면 그녀는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고 한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 19)


사실 관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겪을 만한 마음들에 대처하는 방식이 내 생각에 틈새를 만드는 것이 느껴졌다. ‘모든 것을 신의 뜻이 무엇인지 새겨보며 살아가는 어머니’라는 새로운 개념의 ‘어머니’가 내게 다가온 것이다. 그와 동시에 내가 엄마로서 걸어가야 하는 길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무엇인가 - 눈앞도 아니고, 머릿속도 아닌 어떤 느낌 같은- 환해지며 눈물이 흘렀다.


내가 그동안 아들과 지내오며 겪은 일들이 결국은 이 방향으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이 깊은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결국 우리 아들은 축복받은 인생을 살고 있고, 내가 엄마로서 해야 하는 일은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제야, 항상 묵주기도를 올리고 계시던 외할머니의 모습,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성당에 가시던 엄마의 모습, 밤마다 불경을 펴놓으시고 기도하시는 시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신께 맡기기 위해 기도를 드리고,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는 삶들이 자녀들의 삶에 보이지 않는 뒷받침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삶은 모든 면면이 이어져 있으므로, 마음을 바른 곳에 두면 행동도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늘 퇴근하는 길은 우울감과 무력감이 몰려오곤 했다. 오늘 제대로 못한 것은 무엇인지, 덜 한 것은 무엇인지, 내가 쓸데없거나 추한 존재가 되지는 않았는지를 크게 떠올리곤 했었고, 기분을 올리거나 더욱 처량하게 하는 음악을 들었었다.  그 대신에 성가를 들어보니 그토록 붙잡으려 애쓰던 나의 에고가 무의미하게 여겨진다.


평온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아이들과 하려고 마음만 먹었던 일들을 실제로 해 낼 수 있게 된다. 어젯밤에는 아들이 먼저 같이 올림픽 공원에 가자고 하길래 나가서 같이 달렸다. 물론 집에 돌아와서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에 대해 아이는 좌절하고 격앙되는 일이 있었지만, 적어도 나는 그 감정을 따라가지 않고, 아이가 진정될 때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


새로워지는 날들을 알아차릴 수 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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