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에서 말하듯 뇌는 없는 일도 만들어낸다. 처음에는 빙판에서 스케이트를 탈 수 있다 생각했다. 스케이트를 탄 기억은 없는데 탈 수 있다고 뇌가 말했다. 타 본 적도 있다고 뇌가 속삭였다. 초등학교 시절 롤러스케이트를 곧잘 탔다. 빙판 위에서도 앞으로 나가는 정도는 쉽게 될 것 같았다. 스케이트를 자전거 정도로 여겼다. 어릴 때 자전거를 배우면 어른이 되어 산악자전거, 싸이클 등 모든 종류의 자전거를 탈 수 있듯 스케이트도 그런 거라 생각했다.
3주 전에 처음 스케이트를 배우기 시작했다. 스케이트화를 신고 빙판에 올라서자마자 진실을 알았다. 나는 빙판위에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처음 느껴보는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벽을 잡고 힘겹게 걸었다. 아무것도 잡지 않고 빙판 뒤에 선다거나 빙판 위를 걷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케이트 강습 첫날, 엄청난 경험을 했다. 생각도 못한 발견이었다. 40분 정도 걷기 연습을 하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 기적처럼 깨어났다. 아무것도 잡지 않고 빙판 위를 걷는 것이 가능했다. 몸이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온 몸의 모든 감각이 오직 균형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인간의 몸은 정말 신비로웠다. 얼마전까지 중심을 잡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빙판위에서 중심을 잡으며 걷는 것이 가능하다니. 경이롭고 놀라운 경험이었다. 스케이트 배우는 재미가 무궁무진하게 펼쳐질 것 같았다.
몸 쓰는 방법을 배운 경험들을 떠올려 본다. 야구, 육상, 테니스, 유도, 검도, 선무도, 국선도, 수영. 그 중에 최고는 수영이다. 이유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몸쓰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스케이트는 수영에 버금가는 경험이 될 것 같다. 미끄러지는 빙판이라는 환경에서 몸을 쓰는 방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수영은 정신이 이완된다면 스케이트는 정신이 예리해진다. 딱딱한 빙판과 형체가 없는 물, 맨몸과 칼날이라는 서로 다른 조건에서 몸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면 정신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제 달리기만 하면 뭔가 이룰 것 같다. 땅위를 달리고, 빙판 위에서 미끄러지고, 물에서 유영하는 법을 통달해 서로를 연결짓는다면 오래 동안 이루고 싶은 것에 한층 다가갈 것 같다.
50년 넘게 스케이트날을 갈고 있다는 장인이 한 말이 계속 떠오른다.
“스케이트에 몸이 끌려가면 안됩니다. 몸이 스케이트를 다루어야 합니다.”
빙판과 스케이트화라는 조건에 지배받고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조건을 도구로 여겨 자유자재로 다루는 삶을 배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