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 보호구역. 애리조나 카엔타 외곽 황야 속 외딴 흙집에 나바호족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 옆 버려진 먼지 수북히 쌓인 작은 트레일러에서 한 동안 머물렀다. 그때 가지고 갔던 책은 딱 한 권이었다. 해가 뜨면 황야를 걷고 바라보고 일출과 노을을 보고 책을 읽었다.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4시에 잠에서 깨어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며 해가 뜨길 기다렸다. LA 친구집에서 가져간 책 제목은 ‘종소리‘였다. 저자는 임의진이라는 사람이었다. 인디언 보호구역 중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였던 그 곳에 머무는 동안 그 책을 10번도 넘게 보았던 것 같다. 그때 임의진 목사를 좋아하게 되었다. 독선과 오만이 느껴져 한국 교회나 목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좋아하는 목사가 두 명 있다고 말하곤 했는데, 한 명은 이현주목사, 한 명은 임의진목사였다. 내 기준에 그들은 갈라치기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지 않는 참 기독교인 같았다. 귀국 후 7년쯤 후 2010년쯤 지나는 길에 임의진 목사가 있다는 강진의 남녘교회에 갔다. 얼굴 한 번 보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임목사는 광주인가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만날 인연이 아니구나 싶었다. 그 뒤로 점점 잊혀졌다.
지난 1월 1일 무안공항에 들러 합동분향소에 조문을 드렸다. 줄이 무척 길었다. 2시간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자원 봉사자들이 돌아다니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핫팩과 생수,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분향소 관계자들은 긴 줄을 서서 공항 바깥에서 기다리는 조문객들을 해지기 전에 입장시켜야 한다 생각한 것 같았다. 줄 이동이 빨라졌다. 20명 넘게 한꺼번에 조문을 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었다. 덕분에 1시간 정도만 기다리고 조문을 할 수 있었다. 공항 안에는 유가족 텐트가 크레타 섬 미코노스 궁전의 미로처럼 가득했다. 입을 꾹 다물고 유가족 텐트가 있는 공항 내부를 두 바퀴 둘러보았다. 다음 날 우연히 이번 참사의 한 유가족 이름을 보았다. ’임의진‘이었다. 글을 읽어보니 그의 누나부부와 여동생이 그 비행기를 타고 있었고 모두 돌아가셨단다. 그는 모두가 꺼리는 유가족 텐트 번호였던 44번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한 때 보고 싶었던 사람, 만나러 갔으나 만나지 못한 사람, 그 사람이 그곳 빼곡히 들어선 텐트 어느 구석에 앉아 있었을 거다. 그 상황이 계속 생각난다. 5.18,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로하며 곁에 앉아 있던 그가 이번에는 유가족이 되어 앉아 있다. 그에게 위로받던 세월호 유가족들이 그를 찾아 위로했다고 들었다. 세상은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알려 할수록 모름이 더욱 커진다. 이해하려고 몸부림칠수록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만 점점 커진다. 바람은 하나다. 착한 사람은 잘 살고, 나쁜 인간은 벌을 받는 나라가 되길 바란다. 무엇이 착하고 무엇이 나쁜가는 그가 가진 권력, 재력, 영향력으로 판단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