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은 거들뿐'이 살짝 지겨워질 때
얼마 전 만난 취재원은 슬램덩크에서 김수겸이 제일 좋다고 했다.
취재원과 슬램덩크 얘기를 하는 건 둘째 치고, 왜 김수겸이? 산왕전만 10번 넘게 돌려 읽으면서도 항상 정대만 3점 슛 장면에서 약속이라도 하듯 눈시울이 흐릿해지는 나는 취재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김수겸이 왜 좋아요?"
실제로 김수겸은 분량에 비해서 작품 외적으로 인기가 꽤 많은 편이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잘생겨서... 겠지만, 그 외에도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다.
김수겸은 기본적으로 도전자의 위치다. 전국에서도 먹히는 실력의 포인트가드지만, 도내에서는 빈번히 왕자 해남대부속고에 밀려서 2위를 하는 처지. 게다가 같은 학년에 이정환이라는 동 포지션 최강자가 있으니 만년 2인자 김수겸으로서는 더더욱 환장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런 면에선 채치수와도 비슷하지만, 어떻게 보면 김수겸은 더 아깝다. 작중 배경 전까지도 도내 1라운드에서 빈번히 떨어지던 북산과 채치수는 냉정하게 말해 전국대회는 커녕 도내 최강 해남과 비벼보기도 어렵다. 하지만 상양은 좀 다르다. 어떻게 해서든 해 볼만한데 잘 안 되고, 전국대회에 나가서도 16강 신세. 짐작건대 김수겸은 자신이 확실히 활약할 수 있는 3학년 때 '이번엔 반드시...'라고 승부를 볼 생각이었을 것이다.
마침 팀원들도 모두 3학년에 190cm을 넘는 장신군단. 왕자 해남을 잡을 각오를 굳혔지만 갑작스레 떠오른 북산 때문에 도내 결승에도 가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그 아쉬움이 어떤 것인지는 오히려 요즘에서야 더 절절하게 느낀다. 슬램덩크를 처음 접했던 중학교 때는 잘 몰랐던 감정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김수겸은 작중에서 아쉽다는 감정을 가장 많이 드러내는 캐릭터다. 승부욕 귀신들로 가득한 슬램덩크에서도 이런 경우는 꽤 드물다(비슷한 처지인 윤대협이나 변덕규는 생각보다 깔끔하게 결과를 받아들인다). 작중 내에서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기회를 받지만, 김수겸은 기회마저 없기 때문이다(정확히는 진 거지만).
'그때 왜 그랬을까', '이번에야 말로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잘 안 되는 현실에 깔끔하게 승복하는 건 생각 이상으로 어렵다. 중학교 때보다 김수겸의 마음이 공감되는 건, 구질구질해 보이는 그런 마음이 되레 현실적으로 보여서일지도 모르겠다.
취재원은 그런 김수겸의 대사들이 좋다고 했다. 자신을 꺾고 올라간 북산과 목표로 삼았던 라이벌 해남이 맞붙는 날. 김수겸은 경기를 결국 보러 가지 않는다. 해남이 승리해 또 한 번 왕좌에 오르는 것도, 북산이 승리해 자신들의 꿈을 대리하는 것도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으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실제 고등학생이 느낄 감정인지 신기할 정도로 복잡 미묘하다.
강백호와 북산은 결국 '왼손은 거들뿐'으로 산왕을 잡아내며 어느 정도 꿈과 목표를 이뤘다. 그 노력의 과정과 결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름답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쏟았는 데도 잘 되지 않을 때, 아쉬움을 삼키며 씁쓸해 가는 모습을 스스로 껴안는 것도 삶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왼손은 거들뿐'이 살짝 지겨워질 때, 이런 부분도 함께 생각하면 나름대로 재미가 있지 않나 싶다.
그런 의미에서 슬램덩크는 여러 모로 좋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