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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m asatoma Nov 15. 2024

거리에서 화장 진하게 한 여자를 보시면 이해해 주세요.

화장을 진하게 했어요
걸음마다 그것이 툭툭 떨어질 것 같아서요
평소에 신지 않던 구두도 꺼내 신고 치마도 입었어요
일단은 화장품으로 좀 막아뒀어요
그래도 안구에는 뭘 어쩔 수가 없더라고요
물이 새어 나오지는 않지만 젖은 유리알 같은 안구는 어쩔 수가 없었어요

이번엔 좀 오래가네요
이삼일이면 거뜬했는데 일주일이 더 지난 것 같아요

통통 튀는 밝음 같은 걸 드리고 싶은데
선생님 위해서라면 억지로라도 꾸밀 수 있는데

비 맞아 얼른 벗어버리고 싶은 젖은 옷 같았던지
입고 있다가는 감기에 들 것 같았던지
오늘 너무 이르게 헤어졌어요
선생님 빨리 보고 싶다고 기다렸는데 말이에요

아님 어쩔 줄 몰라하는 제가 보이셨을까요
해는 없이 안개가 낮게 깔린 그런데 춥지는 않은 묘한 날씨였지요
그래도 너무 빨리 헤어졌어요
대로변에서 버림받은 여자 같았다고요

채우고 싶어서 찻집에 왔어요
이곳의 스피거와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으로 채우고 싶어서요
오늘은 음악을 들을 작정으로 스피커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어요

출입문이 가까워 찬바람이 들고
도로에 차 다니는 소리가 때로 나지만
큰 창가득 가로수가 보이는 방향을 등지고 어느 담벼락을 보고 앉게 되었지만
사람들이 주문을 하고
아메리카노를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로 제공해
종업원과 손님 사이에 오가는 말들도 들리고
얼음을 유리컵에 붓는 소리, 얼음과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도 들리지만
앉은자리 옆에 있는 가림벽 너머 어느 연인이 알콩이는 소리도 들리지만
그 모든 것들을 압도하는 스피거와 이 스피커에 어울리는 중저음 보이스의 노래들이 있어서 괜찮아요

긴급 수혈 같은 펌핑이 필요했어요
혈관 속으로 피가 흐르는 것 같지 않았거든요
보컬의 목소리와 드럼 소리만 들리네요
 
수영 강습엔 수영복을 입으러 가는 줄 알았는데
지금 와 보니 적극적으로 숨쉬기를 하러 가는 건가 봐요

아, 그런데 이걸 뭐라고 할까요

좋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듣고 있으니
마치 풍욕하고 있는 것 같아요
바람에 몸을 씻듯 귀가 씻기고
어딘가 조금 기는 것 같아요 어딘지는 모르겠지만요

안전한 공간이 있다면
조도를 낮추고 옷을 모두 벗은 채로
스피커 앞에 몸을 눕히고 싶어요
모든 구멍에, 솜털 하나하나의 구멍에까지
스피커가 내는 진동을 밀어 넣고 싶어요
저 소리의 진동만큼 몸이 떨기를 바라요
몸에 진동을 주고 싶어요

이 거리의 거의 모든 카페에 들어가
어떤 음악이 나오는지를 듣고 나왔어요
그렇게 선택한 장소이니 나는 이곳이 사라진다면 한동안 갈 곳을 몰라할 거예요

만난 사람들, 짧게라도 영혼이 스친 사람들의 공통점을 방금 발견했어요. 목소리.
특정한.. 범주의 목소리가 아닌 사람들은 기억이 안 나요.
남아 있는 것이 없어요.
스피커 옆 자리에 앉을만하지요.

글은 아무래도 안 써지는 걸 보니
글로부터 아주 먼 곳으로 도망갈 준비를 해야겠어요.
이미 한참 물러서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쨍한 글을 쓰는 사람도 되지 못하겠고
성실한 독자는 더욱이 될 수 없으니

어디
바다에 파도소리 들으러 다니고
산에 숲소리 들으러 다니고
거리의 한가운데에서 시장의 한가운데에서
소리를 수집하러 다니겠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목소리 만나면 좋겠고요

마음에 몸에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목소리를 만나면 좋겠습니다


이건,
오늘 너무 이르게 저를 거리에 놓아두셔서 생긴 일이에요


주신 책을 조금 더 읽다가 갈게요
그런데 그 책이요,
글 잘 쓰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만
나는 택도 없다는 것만
영원히 주변인으로 맴돌기만 할 거라면 과감히 등지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것만 말하고 있어요


아무 책이나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봄에 어느 어린 여자가 쓴 종이가 아까운 그런 시집이나 한 권 툭 주셨으면
글 쓰는 거 그거 별거 아니네 하고 무모하게 덤빌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잘 쓰는 사람들이 많은, 문집을 주시면 어떻게 하나요

요즘 자주 풀렸던 신발끈의 이유를 이제 알겠어요

얼른 신발끈을 묶고
뛰라고,
다른 곳을 향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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