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재의 Apr 28. 2020

엄마가 처음 엄마가 된 나이가 되었다.

스물여섯에 엄마가 된 엄마를 떠올리며

 정신 차리고 보니, 20대의 중반과 후반 경계에 걸쳐서 있다. 대학교 1학년 때 세상 멋진 어른 같아 보이던 스물여섯의 모습은 없고, 그냥 몇 년 더 나이 먹은 내 모습이 있을 뿐. 스무 살에 비해 조금 더 성숙해지고, 밥 벌어먹을 만큼의 능력치도 생겼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너무 어리고 젊다. 이른 사회생활을 하며 나이 차이가 나는 사람들과 일을 해서인지 오히려 스스로 대학생 때보다 더 젊음을 체감하는 듯하다.


~나는 젊고 어리고~하고 싶은 것도~너어무 많고~앞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지~

그러다 문득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는 스물여섯, 지금의 내 나이에 엄마가 되었다.

8월 말, 가을이 다가올 준비를 하던 아직은 더웠던 여름. 내가 태어났다. 

 처음 만난 자식이 엄마 눈에는 보석보다 더 귀하고 예뻐서, 이 세상에 나 말고는 귀여운 아기는 없었다고 한다. 자는 사이에 행여 개미가 나를 물까, 고된 육아에 단비 같은 낮잠 시간에도 엄마는 자지 않고 내 곁을 살폈다. 울고 떼쓰는 시간이 많았지만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귀여움이 피어났다고, 엄마는 95년도의 내가 눈앞에 생생하게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나로 인해 처음 부모가 된 엄마는 어렸고, 미숙했고, 게다가 집안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라 더욱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품에 안은 3.5kg보다 무거운 생명의 무게를 지고, 당신의 삶에서 많은 소중한 것들을 덜어내어 내 행복을 빚었다. 지금의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아니,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래서 더 고마운 마음이다. 어찌 되었든, 엄마는 나를 낳았고, 키웠고, 지금의 내가 있다. 엄마는 젊음의 많은 시간을 나를 위해 사용했다. 그러나 그 시간을 대신해 행복해지고 싶지 않다. 엄마의 젊음을 대신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될 수 없을뿐더러, 엄마가 선택한 나를 키우며 들인 수고의 시간을 마냥 희생뿐이라고 치부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엄마는 지금도 앞으로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많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괜찮다고 말한다. 우리가 가진 재화는 한정되어 있으므로, 무언가를 더 나에게 내민다는 것은 엄마 몫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들도 있고, 받는 행복보다 해내는 성취를 얻고 싶다. 나에겐 엄마 앞에 놓인 행복을 내 행복으로 바꿀 권리가 없으며, 엄마에겐 다 큰 자식의 행복을 위해 희생해야 할 의무가 없다. 우리가 서로의 행복을 위해 노력한다면, 그건 부모 자식 간의 어떠한 관계에서 오는 당위적 행위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는 마음. 딱 그 정도였으면 좋겠다. 내 행복이 곧 엄마가 가지는 행복의 대부분이 되지 않길 바란다. 엄마가 좋아하고, 엄마가 원하는 것으로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사랑하는 딸이 행복한 삶을 영위해 가는 모습도 언제고 보여줄 수 있게 노력할 거다. 내 젊음의 시간을 엄마의 남은 시간이 더 엄마 다울 수 있도록,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돕고 싶다.

 3.5kg였던 나는 비교도 안될 만큼 커졌고, 이제는 내가 엄마에게 배우는 것보다 내가 엄마에게 새롭게 알려주는 것들이 많아졌다. 경제적으로도 완전히 독립했고, (아마도) 엄마를 더 이상 속썩이지도 않는다. 비로소 엄마가 엄마가 된 나이가 되어서야 엄마의 안락한 자궁 안에서 완벽히 태어난 느낌이다. 이 자릴 빌려 이렇게 나오기까지 더 커지는 나를 감당하느라 정말로 고생 많았던 우리 엄마에게 큰 찬사를 보낸다. 


내 인생에서 가장 믿음직한 내 편이자, 가장 사랑하는 나의 엄마.

훗날, 나에게 엄마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아주 길게 말해주기 위해 엄마에 대한 글을 쓰려한다.


작가의 이전글 2020년을 맞이하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