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다가 맛있는 커피가 있는 베트남의 카페에 앉아 끄적거려보고 있다.
누군가 내 글을 읽어준다니 한없이 기쁜 마음이 드는 한편 이제는 무언가 꾸준히 올려야 한다는 조금의 의무감도 드는 듯하다.
어쨌든 좋은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20년 초반부터 난리가 났던
코로나로 인해 하늘길이 닫히고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들은 기약없이 미뤄졌다.
그렇지만 내게는 이제라도 호찌민을 꼭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2019년 핀란드에서의 유학시절,
당시 해는 겨우 하루에 네다섯 시간밖에 들지 않았고 그마저도 저 먼 곳의 지평선에 붉은 선으로 비치며 '아 저곳에 해라는 것이 있구나'라는 정도로 느껴졌다.
예측 불가능한 행동으로 웃음을 줬던 친구들
1학기는 국제경영학 수업을 빡빡하게 들었었고 흥이 넘치는 프랑스, 벨기에 친구들이 있었기에 정신없이 과제를 끝내고서는 함께 놀기 바빴다.
한가득 장을 보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항상 즐겁다
그에 반해 2학기는 관광학 수업을 들어 잔잔히 조별과제를 하는 것 외에는 크게 바쁘지 않았다.
눈길을 저벅저벅 걸어가 일주일에 두어 번 한가득 장을 봐오거나, 순전히 할 일이 없어 하루에 두 번씩 아침저녁으로 다녀오는 헬스장에 가는 일 말고는 할 것이 없었다.
자연스레 사색에 빠져드는 시간이 많아졌고, 친구들과 새로운 일을 찾거나 열심히 어울리고 싶지도 않았다.
함께 연주하고 싶어 핀란드에서 산 우쿨렐레, 그리고 항상 날 응원해준 고마운 친구들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며 위로해주던 친구가 있었다. 1학기 때는 그녀가 구해준 자전거를 타고 핀란드의 청량함을 한껏 느낄 수 있었고, 끝없이 긴 밤에는 기타를 들고 찾아와 함께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기도 했다. 그 기억들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꽤나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 그리움을 자극했다.
고마운 일이 참 많은 친구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핀란드에 온 지 2개월이 조금 지났을 무렵 할머니의 부고를 전해 듣게 되었을 때이다. 그다음 날은그녀와 떡볶이를 해 먹기로 한 날이었다.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가족들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고 당장에라도 한국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이미 향수병이 찾아와 조금은 지쳐있던 무렵에 어릴 적 내게 정말 잘해주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견디기 힘들었다.
다음 날 바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향했다.
이미 장례식은 끝난 후였지만가족들을 본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도저히 혼자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여전히 할머니가 많이 그립고 보고 싶다.
그녀에게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한국으로 며칠간 가야 한다고 했을 때,
아침 비행기라는 소식을 듣고는 새벽에 내가 자는 사이에 아침을 만들어 우리 집 앞에 두고 갔다.
그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 내가 헬스장에 운동을 하러 가는 것 말고는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때 잠깐 나와보라고 하고서는 손수 만든 케이크와 편지를 주고 가는 일도 있었다.
걷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음에도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날 위해 항상 함께 산책을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