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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알베르 까뮈

by 김알옹

20대 초반에 읽고 다시 읽어보는 고전. (아직 100년도 안 지났지만 어쨌든 고전)


요즘 애들 말로 하자면 ‘어그로’를 잘 끌어낸 첫 문장.


그 유명한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라는 첫 문장으로 호로자식 커밍아웃을 화려하게 해 버린 뫼르소. 엄마의 장례식에서도 무심한 모습이다.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도 여자를 만나서 놀기나 하고 멀쩡한 듯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날 평소 어울리던 불량한 친구와 해변에 놀러 갔다가 뫼르소는 태양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고 아랍인을 죽인다.


이 사건에 여론은 주변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살인범 뫼르소는 반성도 안 하고 엄마가 죽어도 관심도 없는 호로자식이라고 쳐 죽여야 한다며 들끓는다. 결국 사형선고를 받는 뫼르소.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 오는 일이니 굳이 두렵지 않다고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에게마저 무관심한 뫼르소.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에게 엄청난 관심을 보인다. 그는 관심에 지쳐 제발 나를 좀 내버려 두라고 폭발한다. 모든 걸 불태우듯 폭발하고 난 뫼르소, 그제야 자기가 없이도 잘 굴러갈 감옥 바깥세상의 별빛과 밤 냄새와 뱃고동소리를 느끼고,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고마움을 느낀다.



회사에 MBTI를 맹신하는 사람이 있어서 부서 전 직원이 무려 MBTI 워크숍을 한 적이 있다. '쓸모없어...'라고 생각했지만 회사에선 나름 목소리를 내고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캐릭터라 열심히 참가했는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해왔던 무료 MBTI 테스트보다 문항이 훨씬 더 많은 유료버전 테스트의 결과를 보고 모든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xx님 내향성이 만점이네요? 회사에선 어떻게 버텨요?"


그렇다. 난 사람을 만나면 기가 빨리고, 혼자 있어야 에너지가 충전된다. 남에게 정말 관심이 하나도 없다(직장 동료 아이의 이름을 절대 기억하지 못하는 식으로). 감정도 잘 요동치지 않는다. 계획을 세워서 (나 포함) 누군가를 통제하려 들지 않으며 벼락치기를 즐긴다.


잇팁입니다.


회사를 다니면서 이런 특성이 구축됐는지, 그전부터 이런 성격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20대 때는 대체 뫼르소가 왜 저런 일을 겪고, 저런 짓을 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은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뫼르소는 ISTP다.

내가 항상 세상에 외치고 싶어 하는 말들을 뫼르소가 대신해준다. "LEAVE ME ALONE!" 힘든 티가 나도 그냥 가만히 혼자 놔두면 알아서 회복해 온다. 관심을 과하게 주면 부담스러워서 도망친다. 화가 나도 밖으로 잘 표출하지 않는다.



중학교 때 나는 조용했지만 축구를 곧잘 해서 교우관계가 좋은 편이었다. 소위 말해 적이 없었고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스타일. 싸움이란 것도 해본 적 없었다.


우리 반 축구 에이스 친구가 다리를 다쳐서 며칠 째 목발을 짚고 다녔다. 체육시간이 끝나고 교실에서 교복으로 갈아입고 있는데, (그때는 체육시간이 되면 여학생들은 여학생 탈의실로 갔고 남학생들은 교실에서 대충 체육복을 갈아입었다) 다른 반 어떤 남학생이 우리 반에 놀러 와서는 교탁 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 다리 다친 친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닌가?


난 원래 화도 잘 안 내는데 왠지 그날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태양 때문이었을 거다) 교실 뒤쪽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던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신발을 그 녀석에게 풀스윙으로 집어던지고는 외쳤다. "꺼져 이 x새끼야! 어디 남의 반에 와서 행패야!" (<말죽거리 잔혹사>보다는 훨씬 뒷 세대다) 그 친구는 슬금슬금 교실을 나갔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진짜 모르겠는데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태양 때문이었을 거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는데, 난 벌떡 일어나 도망친 그 녀석의 반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앞문을 확 여니 아직 선생님은 없었고 (아니..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눈엔 그 녀석의 얼굴만 보였다. 지금 기억으로는 뭔가 슬로모션처럼 남은 그때의 나는 그 녀석에게 다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에 주먹을 한 방 날렸고, 얼굴을 감싸 쥐고 쓰러진 녀석에게 뭐라 뭐라 소리를 지르고는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시 우리 반 교실로 돌아왔다.


사람을 때려본 적이 있어야 요령이 있는데, 그냥 무식하게 얼굴에 주먹을 날린 대가는 참혹했다. 그 친구는 코뼈가 부러졌다. 난 교내 폭력으로 징계를 받았다. 어머니는 그 친구의 부모와 학교에 싹싹 비셨고 합의금을 지급하셨다. 난 담임 선생님에게 이거 미친놈 아니냐는 비난을 들으며 허벅지에 피가 나도록 처맞았다. 왜 그랬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남의 반에 와서 다리 다친 친구를 괴롭히는 모습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그만..."이라고 변명했다. 차마 태양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요즘 세상이었으면 학폭으로 불거져 더 큰일이 됐을 만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그렇게 행동한 것은 사실,




아무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이 책을 읽고 뫼르소가 아랍인에게 방아쇠를 당겼던 이유를 이해할 것 같다. 내가 그 친구에게 날린 주먹과 뫼르소의 총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태양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굳이 이유를 붙인 것일 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ISTP만의 일생 단 한 번 있는 분노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난 태어날 때부터 ISTP였던 것이고...


이렇게 책을 읽으며 나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된다.


사람들은 ISTP를 싫어하더라...


그때 그 친구에겐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나중엔 앙금을 풀어냈다. 그 친구와 부모님과 담임선생님 모두에게 이 자리를 빌려 다시금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그땐 제가 미쳤나 봐요... 이제 멀쩡한 성인이 돼서 성실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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