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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결산

짧은 생각들

by 김알옹

10월에서야 9월에 읽은 책들의 독서노트를 꾸역꾸역 써낸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매일 한 권씩 읽겠다고 다짐했던 긴 추석연휴엔 내게 버림신이 깃들어 집을 다 뒤집어엎고 필요 없는 물건들을 다 버렸다. 50L 쓰레기봉지 8개 분량 정도 되려나... 그럼에도 그놈의 추억이 깃든 물건들은 아내와 '이게 언제 적...' 하며 눈을 마주치는 순간 마음이 약해져서 버림신도 외면하고 다시 어딘가 구석에 처박히게 된다.


그리고 아이가 노래를 불러왔던 게임기를 하나 사줬다. 아빠가 20대에 게임에 빠져 인생 난파당할 뻔했던 사실은 전혀 모르는 아이는 신이 나서 게임 사용 계약서를 쓰고는 아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게임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아... 안 돼... 20대 이후로 게임에 손도 안 댔던 아빠는 그렇게 책을 멀리하고 게임의 구렁텅이에 빠져들 것인가...


법무팀 검토 받아야 하는데…



김소영 <어떤 어른>

어린이책 출판사에서 일하다가 가정에서 어린이 독서교실을 운영하는 저자의 책. 전작인 <어린이라는 세계>가 많은 인기를 얻었는데 읽어본다고 빌려놓고 바빠서 읽지 못하고 반납했던 기억이 난다.


요즘 어린이들은 옛날 어린이보다 공부에 파묻혀서 제대로 놀 시간도 없고 스마트폰을 일찍 접하면서 소셜미디어에 노출되어 어른들의 나쁜 문화에 일찍 물드는 현실이 안타깝다. 하지만 아이 친구들을 가끔씩 만나서 짧은 대화를 나눠보면 그래도 어린이는 어린이다. 어떤 인생의 길을 걸어가서 어떤 어른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대다수의 어린이들은 참 착하고 순수하다.


저자는 많은 어린이들을 접하며 삶의 통찰도 얻고,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세상은 더 각박해져서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결심이 인생의 일생일대의 선택이 되어 점점 어린이들의 수가 줄어가고 있다. 하지만 어린이들이 있어야 주변의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좋은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쓰게 되고, 그걸 보고 자라는 어린이들도 좋은 어른이 되는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물론 신경 안 쓰고 마이웨이를 걸어서 눈살 찌푸리게 만드는 어른들도 많지만.





우리 집 앞 대로변에서 골목길에 진입하는 작은 건널목에 횡단보도가 생기고 신호등이 설치됐다. 차량 통행이 많지 않은 골목이고, 차보다 사람이 더 많이 건너는 약 7미터 정도 되는 짧은 건널목이라 사람들은 자주 신호를 무시하고 그냥 건넌다. '대체 이런 곳에 왜 신호등을 만들어서 번거롭게 기다리게 만드는 거야'라는 생각도 자주 한다. 하지만 그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초등학교 정문이 등장한다. 그리고 동네엔 어린이가 꽤 많은 편이고 학원도 많아서 오후 2시부터 저녁 8시 사이에는 그 길을 지나는 어린이들이 무척 많다.


그 횡단보도. 일곱 걸음 걸으면 되니 7미터 정도 되겠군 (출처: 카카오맵 로드뷰)

어린이들은 무조건 그 신호를 지킨다. 친구들과 종알거리며 떡볶이를 먹으러 가는 여자애들도 빨간불 앞에선 멈추고, 학원에 늦은 듯 와다다 달려가는 남자아이도 빨간불 앞에서는 멈춘다. 조용한 성격인 듯 혼자 바닥을 바라보며 천천히 걷는 저학년 아이도 멈추고, 스마트폰에서 낄낄거리는 게임 영상을 보며 걷는 고학년 아이도 멈춘다. 그렇게 멈춰있는 아이들을 보고도 많은 어른들은 신호등을 무시하고 빨간불에 길을 건넌다. 그걸 보면서 가끔 생각한다. 신호를 지키는 어린이와 그냥 무시하고 건너는 어른의 간극에는 대체 어떤 수많은 사건들이 벌어져서 저렇게 변하게 되는 걸까. 어린이가 옳고 어른이 잘못된 그 현장에서 나는 어린이들이 있는 시간엔 묵묵히 그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린다. 어린이들은 신호를 지키며 서있는데 어른이 돼서 잠깐 기다리는 게 불편하다고 신호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 내가 신호를 기다리며 서있다고 어린이들이 그걸 배울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지만, 적어도 내 부끄러움은 덜하게 된다.


(종종 밤 10시 넘어 퇴근해서 그 길을 건너게 되는데, 몸이 너무 피곤해서 잠깐 서있기도 힘들 때면 주변을 살피고 어린이가 있는지 한 번 확인하고 없으면 그냥 건너버린다.)


집에서 아이와 저녁을 먹으며 뉴스를 볼 때면 정치부터 시작해서 날씨까지 가는 그 30분 남짓의 시간 동안 끝까지 채널을 유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수많은 끔찍한 뉴스 꼭지를 읽는 앵커의 목소리에 '대체 이걸 어린이에게 보여줘도 되나? 뉴스에 15금 정도는 붙여야 하는 거 아냐?'라고 생각하며 티브이를 꺼버리거나 뉴스보다 해로운 롯데 야구를 본다. 부디 어린이가 짧은 어린이 시기를 오롯이 즐기며 무사히 성장하는 세상이 만들어지길. 어떤 어른이 돼도 어릴 때 배웠던 작은 인생의 진리들을 잊지 않고 살아가길.




셀딜 멀레이너선, 엘다 샤퍼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행동경제학자와 심리학자가 결핍이 인간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책. 다양한 사례가 등장해서 이해하기 쉽다. 다만 번역이 왜 이렇게 거슬리는지… 특히 그놈의 대역폭(bandwidth)이 너무 많이 등장한다.


풍족한 시간을 낭비하고 나면 마감기한 직전에 몰입해서 평소보다 빠르게 끝내버리는 건 만국 공통이구나 ㅋㅋ 내 영리한 보스는 이런 내 특성을 파악하고 중간점검을 미친 듯이 하고 마감일도 사흘 정도 일부러 당겨 말한다. 월급 받으니까 감사하는 마음으로 회사 다니자.




황선우 <아무튼, 리코더>

리코더라는 작은 악기 하나로도 책을 한 권 뚝딱 써내는 에세이 장인의 솜씨. 유쾌하고 따뜻하다.

초등학생이 부는 작은 막대기라고 얕잡아보면 큰코다친다!




우리 집 어린이가 고사리손으로 학교에서 배워왔다며 삑뿍빽삑 리코더를 불던 모습이 아직 뇌리에 선한데, 한 분야에 빠지면 나보다 더 열심히 검색하고 머릿속에 지식을 쌓아놓는 어린이로 성장했고, 아이의 리코더는 이제 플루트가 됐다. 처음에는 리코더보다 허스키한 소리로 삐익뿌욱빼액 불었다. 몇 달이 지나자 어디선가 들어본 클래식 음악을 서툰 박자지만 꽤나 정확한 소리를 내면서 불고 있었다. 녀석... 성장했구나...


업무로 만난 두 아들의 어머니가 있다. 아들 둘을 훌륭히 키우고 본인 커리어도 무척 멋지게 개척한 분이다. 언젠가 이 분이 아들 둘과 피아노, 바이올린, 클라리넷으로 삼중주를 하는 영상을 보게 됐다. 저 아이들은 나중에 어른이 돼도 엄마랑 같이 연주한 기억을 죽을 때까지 가져가겠구나. 나는 아이에게 어떤 추억을 각인시킨 아빠가 될까. 악기 하나라도 연주할 수 있었다면 플루트를 부는 아이와 합주를 할 수 있었을까? 지금은 아무 악기도 연주하지 못하지만, 난 한때 피아노를 꽤나 잘 쳤다.


어린 시절, 30년쯤 전인가 파트리크 쥐스킨트라는 작가의 책이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은 적이 있다. (영화로도 유명한 <향수>의 작가이다.) 이 분의 책 중에 <좀머 씨 이야기>라는 어느 소년의 성장을 다룬 짧은 소설이 있다. 작중 소년은 피아노를 배우는데, 어느 날 연습을 하다가 짙은 초록색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코딱지가 건반 위에 붙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코딱지를 누르지 않기 위해 소년은 다른 건반을 쳐서 계속 곡을 틀리고, 피아노 선생님에게 크게 혼난다.


나는 중학교 1학년이 되면서, 7년 동안 배운 피아노를 그만뒀다. 코딱지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다녔던 피아노학원은 원장님이 가정집을 개조해 뒷방에서 살림을 같이 하면서 거실에 방 여러 개를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치던 곳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피아노를 제법 잘 친다는 원장님의 사탕발림 때문이었는지 큰맘 먹고 피아노를 한 대 사주셨고, 난 집에서 열심히 연습하고 학원에서 칭찬받는 착한 어린이었다. 열심히 하는 내가 믿음직해서 그랬는지 배가 고프셔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원장님은 나에게 혼자 연습을 하고 있으라고 해놓고는 식사를 하고 와서 레슨을 시작했다.


지금처럼 아메리카노가 전 국민의 음료가 되기 훨씬 전이라 사람들이 마시던 커피는 2-3-3의 맥심-프림-설탕의 믹스커피가 전부였다. 봉지에 든 커피믹스 스틱도 없었고 커피와 프림과 설탕을 각각 티스푼으로 뜨는 방식이다. (내가 왜 이걸 설명하고 있지? 그렇게 오래된 연식은 아닌데...) 원장님은 식사를 하시고 저 커피까지 한 잔 마시고 왔다. 조그만 방에 피아노만 달랑 놓여 있던 밀폐된 공간이었는데, 그 원장님은 절대, 단 한 번도, 방에 들어오기 전에 양치를 하지 않았다.


어디서 조금의 나쁜 냄새가 나면 코를 쥐어 싸는 내 아이가 분명 물려받았을 내 민감한 후각은 김치를 곁들인 평범한 식사 후에 믹스커피를 마신 그 입냅새를 매번 힘들게 참아냈다. 원장님의 입과 내 코의 거리가 30센티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 다 큰 어른이 돼서도 누군가에게 입냄새를 어떻게 지적해야 하냐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을 정도로 이건 아주 큰 실례임을 어린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당시 난 쇼팽의 녹턴이었나 마주르카였나 현란하게 손가락을 움직여야 하는 곡을 연주할 정도로 실력이 좋았는데, 도저히 그 원장님의 입냄새는 참을 수 없었다.


쇼팽의 녹턴이냐, 구취로부터의 해방이냐, 이 둘 사이에서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하다가 난 피아노학원을 그만뒀다. 그 이후로 내 피아노 실력은 시름시름 병을 앓으며 죽어가는 환자처럼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고, 중학교 2학년 음악시간에 피아노 실기시험에서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모두를 놀라게 한 연주를 마지막으로 숨을 거뒀다.


그 뒤로 단 한 번도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그때 원장님이 양치를 세심하게 하는 분이었다면 난 아이의 플루트 연주에 맞춰 피아노를 치며 하하 호호 행복한 가족을 연출하는 한층 더 멋진 아빠가 되어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누워서 배를 긁고 있으니 아이가 달려와 큰북을 치는 소리가 난다며 내 배를 두드리며 연주한다. 그래... 이걸로도 충분하지 뭐.




정명원 <유무죄 세계의 사랑법>

법조계에 있는 친구들이 많다. 대부분 변호사인데 검사가 한 명 있다. 얼마 전에 승진해서 꽤 높은 자리에 올라갔지만 항상 겸손하고 차분해서 좋은 친구다.


- xx야 이번에 특검 많이 열리던데 넌 차출 안 되냐?

- 아유 수레에 실려온 사건 서류들 검토하다 죽겠다... 거긴 나보다 실력 좋은 분들이 가겠지~


정치에 관심 많은 검사들만 자꾸 언론에 노출되니 진짜 열심히 묵묵히 일하는 검사들까지 도매금으로 비난받는데, 친구를 보면 다 같은 직장인이고 희로애락을 느끼는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기소권이 있는...)


예전에 김웅의 <검사내전>에서 책 전반부에서 그린 평범한 검사의 생활을 참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한창 뜨거운 시기여서 책 후반부는 그 내용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런데 저 양반은 빨간 옷을 입고 국회로 가더니 그저 그런 정치인이 됐더라.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다.


이 책도 처음엔 검사가 책으로 인기를 얻어서 정치판이나 기웃거리지 않겠냐는 시선으로 색안경을 끼고 읽었다. (사실 100페이지 넘게 읽을 때까지도 남성 작가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그냥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검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뿐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아등바등 조직 내 정치질을 해서 높은 자리로 가려는 야망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묵묵히 자기 일을 하면서 잠깐 생기는 여유를 즐기고 따뜻한 글을 남긴다.


성폭행을 시도하는 남자의 혀를 깨물어 상해를 입혔는데, 정당방위를 인정받지 못한 최말자 씨의 재심에서 담당 검사였던 작가님은 해당 사건에 61년 만에 무죄를 구형했다. 법정에서 사과도 하셨다고 한다. 이런 모습이 우리가 검사에게 기대하는 인간적인 면모다. 불의를 수사해서 처벌하고, 억울한 약자를 돕고, 사회가 법 시스템 안에서 안전하게 유지되도록 돕는 역할. (물론 입법기능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야겠지만)


형법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명한 판례라고 하는데, 참 오래도 걸렸다.


이렇게 따뜻한 마음의 검사님이라면 얼마든지 조사를 받으러 갈 용의가 있… 아니 그러면 안 되지만 그만큼 좋은 사람이 쓴 글이라 읽으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그동안 검사 출신 개차반들이 정치판에서 똥을 싸대고 온몸에 똥칠을 하며 굴러다니던 모습을 보느라 피곤했던 탓도 있겠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읽었던 '검사 엄마 2' 부분을 가져와 본다.


검사 3년 차에 첫 아이를 가졌다. 집안의 맏이인 데다 여자 형제가 없어서 임신한 여성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적이 없었던지라 당시의 나는 모든 면에서 무지했다. 옆방에 있던 여성 선배에게 가서 임신 소식을 알리자 선배는 아주 잠깐이지만 말이 없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시작되는지 알지 못한 채 마냥 해맑은 이 후배에게 어디부터 어떻게 조언을 해줘야 할지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잠시 만에 “축하한다.”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선배의 환한 웃음 뒤로 어쩐지 근심이 서리는 듯했다.

아이는 내 뱃속에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나와 함께 매일 검찰청으로 출근해야 했다. ‘누가 누구를 속였대. 그가 그녀의 집에 침입했대. 어떤 이는 평생 모은 전 재산을 잃었다. 다른 사람의 신체를 몰래 사진 찍었대. 음주운전을 하다 사람을 쳤대. 사라졌던 그가 변사체로 발견되었대. 그녀가 그를 죽였대.…’ 세상의 온갖 끔찍한 이야기들을 아이는 엄마 뱃속에서 보고 들었다.

‘이때는 바르고 예쁜 것만 보아라.’

집안 어른들은 말했지만 공허하게 들릴 뿐이었다. 하루 종일 인간의 온갖 아픔과 슬픔과 거짓말을 헤집다가 퇴근해서 듣는 클래식 같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대신 이제 귀도 눈도 심장도 생겨 인간의 모습을 오롯이 갖추게 된 뱃속 아이에게 검사 엄마는 조용히 속삭였다.

‘아가야. 엄마는 네가 나올 좋은 세상을 위해서 기꺼이 나쁜 것을 보고 있는 거란다.’

엄마의 말을 이해했는지 아이는 뱃속에서 별 탈 없이 무럭무럭 자랐다.

뱃속에 아이를 품은 여성 검사의 처우에 대해 여러 가지로 무지하거나 무심했던 시절이었지만, 그 와중에 약간의 혜택이라고 한다면 변사체 검시를 면해준다는 것이었다. 원인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변사 사건이 발생하면 검사가 사체를 직접 확인하는 일이 변사체 검시인데, 돌아가면서 하던 변사체 검시 순번에서 임신한 검사는 빼주었다. 아무리 모성 보호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 인류애는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 나가서 직접 사체를 확인하는 직접 검시만 면제되었을 뿐, 서류를 보고 변사체에 대한 다음 절차를 지휘하는 일까지 면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변사 사건 서류에는 사체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도록 다각도에서 찍은 상세한 사진이 첨부되는데, 뱃속에 아이를 품고 있는 입장에서 그 사진들을 보는 것이 아무래도 기꺼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 나와 검사실에서 함께 일하던 실무관이 나를 위해 사진이 있는 부분에 미리 클립을 꽂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심결에 기록을 휙 넘기면 꼭 사체 사진이 있는 부분이 덜컥 펼쳐지곤 했다. 사진이 붙어 있는 페이지가 두꺼워 무게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다시 배를 쓰다듬으며 주절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가야, 엄마는 지금 좋은 세상을 위해 기꺼이 무서운 것을 보고 있는….’

태교로 범죄에 대한 조기 교육을 한 탓인지, 지금 고등학생이 된 딸아이는 범죄물을 즐긴다. 또래들에게 인기 있다는 로맨스물 대신 각종 형사물과 추리물, 범죄 추적 탐사물을 좋아한다. “그런 게 재밌나?” 물어보면 “흥미롭잖아.“라고 대답하는 딸아이를 보며, 한없이 거칠었던 태교의 영향인가 생각해 보게 된다.

딸아이는 덧붙여 “나는 강력 범죄보다는 사기 범죄 같은 쪽이 좀 더 재밌는 것 같아.“라고 말했다. 아이를 임신했을 당시 나의 전담은 금융 경제 범죄였다. 조사를 받던 피의자가 거짓말을 한다 싶으면 그때까지 잠잠하던 뱃속의 아이가 꿈틀꿈틀 태동을 했다. 살아 있는 거짓말탐지기가 따로 없었다.

여성아동범죄조사부에 가깝게 지내는 임신한 여성 검사가 있었다. 여성아동범죄조사부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주로 강간, 강제추행 등 성범죄와 아동학대 등 아동에 대한 범죄를 다루는 부서다. 불룩 나온 배를 내밀고 하루 종일 강간범을 조사했다는 후배는 조사를 마치고 나면 배가 땡땡하게 굳는다고 했다. 조사하느라 저녁도 못 먹었다며 불룩 나온 배를 덮고 있는 원피스의 양쪽 주머니에서 삼각김밥을 네 개나 꺼냈다. 여성아동범죄조사부는 인간의 추악하고 더러운 욕망들을 가장 내밀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정신적인 고충이 많은 부서다. 이런 부서에다 임신부를 넣어놓는 게 말이 되느냐고 후배는 투덜거리다가, 하긴 해도 괜찮은 전담이 우리 일 중에 뭐가 있겠냐며 그 자리에서 삼각김밥 네 개를 다 먹고 또다시 야근을 하러 갔다. 그 와중에 대검에서 임신 축하 선물로 전자파 차단 앞치마를 보내줬다고 자랑했다. 우리에게 해롭기로는 전자파가 문제가 아닐 테지만, 그거라도 어디냐고 하면서….

당시 후배는 어떤 성폭력 사건의 수사를 엄청 어렵게 이어가고 있었는데, 출산을 위해 들어가기 전에 그 사건만은 처리하고 가겠다고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 사건을 처리하지 못해서 애 낳으러 못 가는 꿈을 꾼다고도 했다. 나를 만날 때마다 몇 달을 그 사건 얘기만 하더니, 출산 들어가기 며칠 전에야 가까스로 사건을 재판에 넘겼다. 그마저도 결재 과정에서 시간이 걸려 원래 들어가려던 날짜보다 며칠 늦춰서야 출산 휴가에 들어갈 수 있었다. 후배가 아이를 낳고 한참 지난 뒤 그 사건에 유죄가 선고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봤다. 후배에게 연락해 보니, 그때 엄마 뱃속에서 ‘기소냐 불기소냐’ 세기의 고민을 함께했던 아기는 이제 세상에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고 했다. 그 아이가 발 딛는 세상이 아주 조금은 안전해진 것이라고 생각해 보면, 딴딴한 배를 안고 애태우던 지난날들이 조금은 뿌듯하다고 후배는 웃었다.

출산의 진통이 극에 달했을 때, 중간에 힘 빼지 말라는 간호사의 거친 고함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하나의 명제만 생각했다.

‘이건 낳아야 끝나는 일이다.’

당장 아무리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중단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일. 마침내 끝을 봐야 끝나는 일이라는 사실이 그 순간 힘이 되었다. 그런 식의 문제 인식과 해결은 나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방식이니까. 마침내 와락, 미끄덩하고 뜨거운 것이 세상으로 쏟아져 나오는 순간, 드디어 끝났다고 생각했다. 내가 성공적으로 하나의 과업을 완수했다는 만족감이 차오르는 것도 잠시, 퉁퉁 부은 얼굴에 머리숱이 유난히 새까만 작은 생명체를 받아 안은 순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명백한 시작이었다.

다음 스테이지에 어떤 괴수가 숨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눈앞에 있는 스테이지 하나를 깼다고 의기양양한 초보 게이머처럼 무방비한 채로 다음 단계가 시작되었다. 출산이라는 단계를 비로소 완결하고 다음 단계를 마주하자마자, 이건 전혀 다른 차원의 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테이지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몸이, 내 몸이 아니었다. 분명히 내 몸인데, 이전과는 다른 몸으로 물성 변화한 것 같았다.

첫 아이를 낳고는 출산 휴가가 끝나자마자 바로 복직했다. 왜 육아휴직을 하지 않고 바로 나왔냐고 훗날의 후배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었는데, 그때는 그런 시대였다. 그나마 출산 휴가 90일을 오롯이 쓸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할 뿐, 육아휴직은 고려 대상조차 아니었다. 얼굴에 붓기가 빠지지 않은 채로 업무에 복귀했다.

문제는 젖이었다. 출산 직후부터 집에 있는 동안 오롯이 모유를 먹였다. 그전에는 몰랐던 사실이지만 나는 의외로 모유 수유에 재능이 있었다. 산후조리원에서 젖몸살을 앓거나 젖이 안 나온다고 우는 엄마들 사이에서 거뜬히 완모를 해내며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 인간의 몸에서 다른 인간을 먹여 살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실로 경이로웠다. 내가 만들어낸 것을 빨아먹고 이 작은 인간의 팔목이 오동통해졌다.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그가 가진 모든 힘을 짜내어 쪽쪽 젖을 빨다가 어느 순간 픽 잠들어버리는 작은 생명체를 안고 있는 동안에는, 이 막막한 우주에서도 아기와 나만은 연결되어 있다는 유대감이 벅차게 차올랐다. 그런 이유로 업무에 복귀할 때까지 아기도 나도 젖을 떼지 못했다.

처음에는 유축을 했다. 당시 근무하던 검찰청에는 사무실에 조그마한 개인 집무실이 있어서, 그곳에다 유축기를 설치해 놓고 유축을 했다. 검사 일도 해야 하고 엄마 노릇도 해야 하는 이중적 과업을 가진 자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집무실 작은 테이블에 앉아 한 손으로는 유축기를 가슴에 가져다 대고, 나머지 한 손은 골무를 끼고 사건 기록을 읽으며 젖을 짰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도 귀는 얇은 칸막이 옆 사무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향해 열려 있어야 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라도 유축기를 끄고 뛰어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푸쉬푸쉬 반복적인 유축기 소리에 맞춰 사기 사건이나 살인 사건 기록을 넘기다 보면 우리 아기의 뺨을 살찌울 뽀얀 맘마가 보관팩에 모였다. 어떤 농장에서는 좋은 우유를 생산하기 위해 젖을 짜는 동안 소에게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기도 한다는데, 범죄 기록을 읽으며 짜는 젖이라니… 이것 참 싶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하고 계속하던 유축을 그만두기로 한 것은 어느 선배의 경험담을 듣고 나서다. 선배도 몇 년 전에 나처럼 출산 직후 사무실에서 유축을 했다고 한다. 그날은 당직 날이었다. 당직인 날에 보통 검사들은 자기 사무실에서 밀린 일들을 하고 있으면 당직실에 접수된 서류를 당직실 담당자가 가져다준다. 선배가 집무실 안에서 유축을 하고 있는데, 직원이 서류를 들고 왔다. 당직에 접수되는 서류는 보통 시급을 다투는 경우가 많으므로 빠르게 검토하고 결재해 주어야 한다. 선배는 유축을 중단하고 서둘러 집무실에서 나와 사건을 검토하고 결재한 서류를 직원에게 건네주었는데, 그러는 동안 어쩐지 직원은 눈을 못 들고 몸을 옆으로 꼬며 있다가 황급히 서류를 받아 떠나더라는 것이다. 직원이 가고 나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선배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는데, 급히 나오느라 미처 풀어헤친 옷섶을 여미지 않은 채 그냥 나온 것이었다. 그 와중에 아기 먹일 모유 보관팩은 잘 여며놨더라며 선배는 웃었지만,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웃을 수가 없었다. 그 일은 필시 머지않아 나에게도 닥칠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유축을 중단했다.

유축을 중단하고 나니 불어나는 것이 문제였다. 흡수포를 대봐도 잠시 방심하면 셔츠 앞섶이 젖어 있기 마련이었다. 무엇보다 땡땡하게 부어오른 가슴이 너무 아팠다. 이 고통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문제도 점점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젖이 차오르는 시간이 점점 늦춰지더니, 언제부턴가는 저녁 6시가 되어야 젖이 차올랐다. 일과 중에는 따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만큼 괜찮다가, 6시가 되면 급격히 가슴이 땡땡해졌다. 공무원의 퇴근 시간에 맞춰 정확히 차오르는 젖이라니… 나는 젖조차 공무 수행에 적합한 인간이구나.

6시 퇴근 종이 울리는 것을 신호로 맹렬히 차오르기 시작하는 가슴을 안고 정신없이 퇴근해 아기를 안으면, 아기도 허겁지겁 젖가슴을 파고들었다. 아기의 조그마한 입이 오물거려 터질 듯한 압박감이 마침내 풀리는 순간, 그 시원함과 안도감은 역시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리라. 그런 걸 알 리 없는 남자 상사들이 종종 회식을 잡았다. 친목이고 뭐고 해결되지 않는 압박감으로 정신이 혼미해지기 일쑤였다. 이성을 잃은 내가 상을 뒤엎거나 부장을 향해 주먹을 날리게 되는 미래가 자꾸 그려졌다. 지금이라면 부장이건 누구한테 건 사정을 설명하고 회식에 빠지겠다고 했을 텐데, 그때만 해도 햇병아리였던 나는 그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어느 날 맞은편에 앉아 간신히 버티고 있던 나에게 상사가 말했다.

“아니 정 검사, 왜 그렇게 입술을 꽉 깨물고 있어?”

도저히 참지 못한 어떤 날은 회식 중간에 몰래 나와 택시를 타고 집에 가서 젖을 물리고 다시 나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옛날 엄마들은 김매다가 집에 와서 애 젖 물리고 다시 김매고 했다던데, 회식하다 젖 물리고 뛰어나와 다시 회식하는 삶.

그렇게 힘들게 젖 먹고 자란 첫째는 어려서부터 어딘가 쿨한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엄마가 출근한다고 가방을 들고 나서도 울지 않고 선뜻 손을 흔들어주었다. 엄마가 직장에서 험한 꼴 보이지 않기 위해 유축을 중단한 이후 별 저항 없이 분유를 받아들였다. 엄마가 공무를 수행 중인 9시부터 6시까지는 분유를 군말 없이 먹다가 6시 땡 퇴근에 맞춰 가방을 집어던지며 달려드는 엄마를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엄마 젖을 꿀꺽꿀꺽 삼켰다. 진정, 검사의 딸로 타고난 것이 아닌가 대견하면서도, 뱃속에서부터 탑재했을 그 쿨함이 한편으로는 짠하기도 했다.

초등학생 둘째는 자기 방이 있는데도 아직 엄마와 한 침대에서 자는데, 이제 슬슬 잠자리 독립을 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는 둘째에게 쿨한 누나가 슬쩍 조언한다.

“야, 즐길 수 있을 때 엄마를 충분히 즐겨. 흔히 있는 엄마가 아니잖아.”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있고, 또 수없이 다른 엄마들이 있다. 엄마는 한 가지 종류가 아니다.

어느 날엔가 아이가 “엄마는 왜 다른 엄마들처럼 같이 있어 주지 않느냐”라고 묻는다면 해줄 대답으로 미리 만들어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한 번도 그렇게 묻지 않았다. 아이들은 ‘우리 엄마는 왜 그래?’ 묻는 대신 흔치 않은 형태로 출몰하는 엄마를 꽉 차게 즐길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묻지 않아서 쓸 기회가 없었던 대답을 나는 가끔 스스로에게 들려준다. 잠든 아이의 발을 한 번 꼭 쥐었다가 놓고는 새벽 출근길이나 저녁 식사 배달 주문을 해주겠다고 하고 까맣게 잊은 어느 날의 늦은 퇴근길에. 그리고 고민한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종류의 엄마가 되어줄 수 있을까.

우리 집에는 ‘엄마표 소금 씹히는 볶음밥’이라는 요리가 있다. 말 그대로 엄마가 만드는 볶음밥인데 급하게 만들다 보니 소금 입자가 채 녹지 않아 바스락 씹히는 볶음밥이다. 주말을 집에서 보내고 다른 지역에 있는 근무지로 출근하기 위해 새벽길을 나서기 전에, 월요일 아침 다급히 만들던 볶음밥을 아들은 그렇게 불렀다. 이름을 붙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요리를 좋아하기까지 해서 다급하지 않은 날에도 그 스타일로 볶음밥을 해달라고 청하기도 한다. 무심코 먹다 보면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바스락 소금 입자가 씹히면서 짠맛이 확 퍼지는 엄마표 볶음밥. 그런 게 왜 좋으냐고 물었더니 아들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팍 터지는 게 재밌잖아. 골라 먹는 아이스크림에 있는 슈팅스타 같은 거야.”

아··· 그러니까 나는 볶음밥을 슈팅스타로 만드는 엄마였군. 소금이 오도독 씹히는 볶음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엄지 척을 해주는 아들은 이런 종류의 엄마라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결국 엄마란 엄마 혼자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의 삶과 반응하면서 규정된다는 걸 깨닫는다. 굳은살처럼 달라붙은 엄마의 미안함과 망설임 앞에 언제나 한 발 앞서 현명한 답을 찾아내는 아이들이 있어 검사 엄마는 오늘도 조금 어깨를 편다.


박지영 <복미영 팬클럽 흥망사>

아이돌 덕질 이야긴가 해서 몇 페이지 넘기면서 나오는 문장이나 단어들이 정말 그런가 싶어 빌려 읽었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렇게 호감가는 캐릭터는 아니어서 가볍게 읽었지만, 돌봄 노동이나 사람들이 멸시하는 '이모님'들이 제공하는 가치들은 가볍게 읽혀져서는 안 된다.


프랑크 디쾨터 <해방의 비극>

외부인의 시선으로 본 중국 인민의 역사 <인민 3부작>의 첫 번째 이야기. 거대한 나라 중국이 수십 년간 자행한 뻘짓의 장대한 시작. 모옌, 위화, 옌롄커 등 중국 작가들의 작품들에서 생긴(<삼체>도) ‘대체 공산당 치하의 중국에선 무슨 일들이 일어났길래 이렇게 잔혹한 죽음이 많이 등장할까?’라는 의문의 원천을 알아보기 위해 두꺼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자는 공개된 중국 정부의 자료를 기반으로 수많은 기록들을 검토해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인민들의 죽음을 조명한다. 일제의 침략으로 죽고, 국공내전으로 죽고, 한국전쟁 참전으로 죽고, 토지개혁으로 죽는다. 각 사건마다 기본 수백만 명의 사람이 죽어나간다. 정말 끊임없이 죽는다. 그리고 그 죽음을 지시하는 주체는 그들의 지도자 마오쩌둥이다.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어도 독재자의 한 마디, 짧은 생각, 시선 하나까지 다 한겨울 산꼭대기에서 굴린 작은 돌이 큰 눈사태를 일으키듯 인민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다른 나라의 독재정권이 유대인을 말살하려는 의도적인 학살이었다는 점에서 20세기에 벌어진 사건 중 압도적인 무게가 있지만, 중국 공산당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죽음에 이르게 한 수천만 명의 중국인의 목숨은 잘 조명되지 않는다. 언론 통제 탓인지 중국의 힘이 커서 그런지 모르겠다.


대량 학살이라는 숲 앞에서 하나의 죽음이라는 나무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 작가들이 숲 속으로 들어가 나무를 한 그루씩 들여다 보며 큰 숫자에 가려진 하나하나의 죽음들을 위로하려고 저런 소설들을 쓴 것 아닐까 생각한다.


이후 2부는 대약진운동으로 인한 대기근, 3부는 문화대혁명을 다룬다. 이미 조금은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지만 기대… 아 이딴 기대는 싫다.


공현진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난 돈 욕심 집 욕심이 별로 없고, 아내도 마찬가지다. (사실 아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 평생 살까 생각하고 있다. 10분쯤 걸어가면 한강이 나오고, 15분쯤 걸어가면 산이 나온다. 지하철역도 10분쯤 걸어가면 되고, 아이 학교도 다 그 반경 안에 있다. 동네에 유흥시설이 없고 술집마저 별로 없다. 동네 주민들도 모난 사람들이 별로 없어보이고 아이가 다닐 학교들도 애들이 착한 편이어서 학폭 등 골치 아플 일이 많이 없다고 한다. 결혼하고 10년 넘게 이 동네에서 살면서 나쁜 일이 생기는 걸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리고 우리 동네 도서관은 정말 좋다!! 동네 부동산에서 들으면 뜬금없다고 할 만한 도서관 자랑이 왜 등장하는가.


집에서 자전거로 10분 정도 가면 메인 도서관이 나온다. 이 도서관은 서가에서 한강이 보인다. 걸어서 10분 정도 가면 작은 도서관이 또 있고, 반대 방향으로 10분 정도 가면 스마트 도서관이 있다. 관내 8개의 도서관의 책들을 온라인에서 검색해서 상호대차를 하거나 예약을 하고 며칠 기다리면 스마트 도서관에서 찾아갈 수 있고 반납 또한 가능하다. 온라인 시스템은 사용자 친화적으로 잘 구축되어 있고, 보유 장서 수도 굉장히 많을 뿐더러, 종종 양질의 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모두 무료다! 내가 낸 세금이 이렇게 좋은 독서 환경을 구축하는 데에 쓰인다니 정말 뿌듯하다.


책이 인생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나에게는 최상의 환경인 셈이다. 물론 더 좋은 도서관 환경이 구축된 지역도 있겠지만, 분명 그런 동네는 집값이 비싸거나 직주근접성이 떨어질 거다. 돈도 부족하고 시간도 부족한데 더 열심히 일하거나 투자로 성공할 자신은 없기에 그냥 지금 동네에 만족하고 살고 있다.


지금까지 관내 도서관에서 수많은 북토크가 열렸다. 주로 소설가 분들을 모셔서 진행하는지라 소설 위주의 독서활동을 하는 나에게 딱 맞는 프로그램이지만, 일단 시간이 평일 저녁이라 여의치 않기도 했고, 작품만 읽으면 됐지 작가님까지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김애란 작가님의 북토크가 열린다는 것이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과 <안녕이라 그랬어>를 재미있게 읽으며 중견 작가의 끝없는 노력에 감탄했던 기억에 대뜸 참가신청을 했다. 그리고 다른 도서관들의 프로그램들을 둘러보다가 이 책의 공현진 작가님 북토크를 발견하고 또 참가신청을 했다. 일주일에 두 번의 북토크 참여라니! 책읽는 즐거움이 한층 깊어지겠지?


동네를 공개하긴 좀 그래서 지웠음. (출처: 우리동네 도서관)


어느 평일 저녁에 재택근무를 마치고 도서관 강당으로 갔다. 공현진 작가님은 마치 학원 선생님 같은 강의력(!)으로 표제작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의 창작 배경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셨다. 국문학 박사 학위를 갖고 있고, 다문화 관련 연구로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신다는 말에 뛰어난 강의력의 원천을 이해하게 됐다.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 <선자 씨의 기적의 공부법> 이야기를 꺼내셨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아했던 작품이다.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려고 미친 듯이 공부하는 선자씨의 이야기를 마음 속으로 응원하며 읽었는데, 실제 작가님의 이모님이 그 자격증 공부를 하시는 모습을 보고 소설을 쓰셨다고 한다. 한창 재미있는 사연을 풀어주고 계시는데 갑자기 아이한테 전화가 온다.


"아빠... 나 학원 앞에 자전거 세우다가 넘어졌는데 너무 아파... 걷기 힘들고 수업도 못 듣겠어..."


집에서 도서관은 10분 거리, 학원은 집과 도서관 딱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와... 작가님 강연 진짜 재미있는 부분으로 접어들고 있는데... 눈물을 머금고 바로 뛰쳐나와 학원으로 달려갔다.


일단 수업에 들어갔던 아이가 교실에서 나오는데 씨익 웃으며 나온다. 크게 다치진 않았고, 그냥 요즘 학원 숙제가 과하게 많고 내용도 어려워서 오늘은 수업을 듣고 싶지 않았나보다. 그래, 그런 날이 있지... 아빠도 어릴 때 학원 가기 싫어서 땡땡이 치고 오락실 가서 격투게임하다가 어머니한테 걸려서 집까지 격투게임처럼 맞으며 끌려갔던 아픈 기억이 있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걸어간다. 조금 절뚝이는 것 같았던 아이는 아빠가 어릴 때 맞으며 끌려간 얘기를 들으며 낄낄대더니 어느새 멀쩡하게 걷는다.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카이저 소제 뺨 때리는 꾀병이다. 아예 도서관이 집에서 엄청 멀었으면 "어... 아빠 지금 바로 갈 수가 없는데 어쩌지?"하고 난감했을 텐데, 작가님 북토크를 끝까지 못 들어서 아쉬웠지만 그래도 아이랑 함께 귀가하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


아, 공현진 작가님 소설 참 좋다. 너무 극단적인 시선도 아니고, 너무 몽글몽글하고 안온한 시선도 아니고, 다른 작가님들이 안 다루는 이주노동자, 환경 등의 문제를 다루는 시선이 꽤나 신선하다. 앞으로의 집필 활동이 기대되는 작가님이다.



김주혜 <밤새들의 도시>

장편을 쓰려면 이렇게 써야지!! 발레를 소재로 이별했다 재회하는 천재 발레리나의 여정을 빠른 전개로 그려냈다. 영화 <블랙 스완>이 천재 발레리나의 붕괴하는 자아를 잘 그려냈다면 이 작품은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되찾는 해피엔딩. 한국계 작가님이라 그런지 한국어판 번역에 직접 손을 좀 대신 모양인 듯 마치 한국어로 쓰인 소설처럼 매끄럽게 잘 읽힌다.


전작 <작은 땅의 야수들>도 그렇고 이 작품도 그렇고, 개인적인 비교 대상은 이민진 작가님의 <빠찡꼬>와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인데, 김주혜 작가님이 좀 더 미시적인 주제를 빠른 속도로 다뤄서 소설 읽는 재미가 더 있는 편이다.



박종훈 <세계 경제 지각 변동>

금리 조절만으로 잡히지 않는 불경기를 해소하고자 바이든 정부에서 국채 발행으로 재정지출을 잔뜩 해놨는데 그 만기가 올해 말이라 트럼프 정부가 고생 꽤나 할 거라고 한다. 이제 금리로는 약발이 안 먹고 재정지출을 더 하면 인플레이션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할 거라는 예측. 그래서 트럼프가 선택한 관세 폭탄을 통한 타국의 이익을 강탈해 오는 전략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거시적 경제 현상들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잘 풀어낸 작가님의 역량이 느껴진다. 전작 <트럼프 2.0 시대>도 비슷한 분위기와 주제로 잘 쓰신 책이었다. 가끔 팟캐스트에 나와서 경제 해설해 주실 때도 책처럼 쉽게 이야기해 주신다.



프랑크 디쾨터 <마오의 대기근>

연구자에 따라 3천만 명에서 5천만 명 사이의 다양한 수치가 제시되는 사망자의 수. 일반적인 전쟁이나 학살(일반적이라는 수사를 붙일 수 없는 특별한 사건들이지만)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숫자다. 1958년부터 1962년 사이 중국의 대약진운동으로 벌어진 대기근으로 사망한 중국 인민의 숫자이다.


마오쩌둥 한 사람이 이 모든 원인을 제공했는가? 그의 잘못된 사상이 강가 상류에 풀어놓은 독처럼 아래로 흘러들어 가 공산당 조직을 물들여 애꿎은 인민들만 희생되고 믿을 수 없는 국가 전반의 쇠퇴를 불러왔다. 사회 전반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공산당은 어떤 헛발질을 해댔는지 적나라하지만 건조하게 그려진 이 책에서 난 그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무력감과 안타까움을 느낄 뿐이다.



권혜영, 성해나, 성혜령, 이주란, 한지수 <끼리끼리 사이언스>

성해나 이름 하나 보고 읽은 책. 앤솔러지 주제에 맞춰 작가님들이 열심히 쓰신 것 같은데, 작품들이 하나같이 서사가 약하다. 뭉근하게 끓여서 씹히는 것 하나 없고 소금기도 없는 식은 감자수프를 퍼먹는 기분으로 책장을 넘겼다. 심지어 이야기 재간꾼 성해나 작가님도 이 흐름에 동참한 듯 별 재미가 없다.


장강명, 차무진, 소향, 정명섭 <우리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사>

책 뒷표지의 카피가 과하게 자극적이라 ‘그래 이 정도로 세게 나온다면 읽어주지…’ 라고 생각하며 집어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살아 있는 딜도조차 아니었다.”


금지된 사랑을 다룬 앤솔러지. 앤솔러지에 들어가는 작품들 치고 퀄리티 좋은 작품을 만난 경험이 많지 않아서 순전히 카피와 장강명 이름만 보고 읽었다.


장강명 작가님의 <투란도트의 집>은 참 찰지게 읽히는 작품이다. 오페라 <투란도트> 내용이 저랬구나… 두 슬픈 이야기를 적당히 교차시키는 테크닉이 빛난다. 차무진 작가님의 <빛 너머로>도 그럴 듯한 반전이 있어서 괜찮았다.


당분간 앤솔러지는 자제하려고 한다. 이 책 문제가 아니고 좀 지친다…


책 말미에 나온 기획 의도와 고 정아은 작가님을 추모하는 글들은 가슴이 찡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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