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우
리코더라는 작은 악기 하나로도 책을 한 권 뚝딱 써내는 에세이 장인의 솜씨. 유쾌하고 따뜻하다.
우리 집 어린이가 고사리손으로 학교에서 배워왔다며 삑뿍빽삑 리코더를 불던 모습이 아직 뇌리에 선한데, 한 분야에 빠지면 나보다 더 열심히 검색하고 머릿속에 지식을 쌓아놓는 어린이로 성장했고, 아이의 리코더는 이제 플루트가 됐다. 처음에는 리코더보다 허스키한 소리로 삐익뿌욱빼액 불었다. 몇 달이 지나자 어디선가 들어본 클래식 음악을 서툰 박자지만 꽤나 정확한 소리를 내면서 불고 있었다. 녀석... 성장했구나...
업무로 만난 두 아들의 어머니가 있다. 아들 둘을 훌륭히 키우고 본인 커리어도 무척 멋지게 개척한 분이다. 언젠가 이 분이 아들 둘과 피아노, 바이올린, 클라리넷으로 삼중주를 하는 영상을 보게 됐다. 저 아이들은 나중에 어른이 돼도 엄마랑 같이 연주한 기억을 죽을 때까지 가져가겠구나. 나는 아이에게 어떤 추억을 각인시킨 아빠가 될까. 악기 하나라도 연주할 수 있었다면 플루트를 부는 아이와 합주를 할 수 있었을까? 지금은 아무 악기도 연주하지 못하지만, 난 한때 피아노를 꽤나 잘 쳤다.
어린 시절, 30년쯤 전인가 파트리크 쥐스킨트라는 작가의 책이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은 적이 있다. (영화로도 유명한 <향수>의 작가이다.) 이 분의 책 중에 <좀머 씨 이야기>라는 어느 소년의 성장을 다룬 짧은 소설이 있다. 작중 소년은 피아노를 배우는데, 어느 날 연습을 하다가 짙은 초록색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코딱지가 건반 위에 붙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코딱지를 누르지 않기 위해 소년은 다른 건반을 쳐서 계속 곡을 틀리고, 피아노 선생님에게 크게 혼난다.
나는 중학교 1학년이 되면서, 7년 동안 배운 피아노를 그만뒀다. 코딱지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다녔던 피아노학원은 원장님이 가정집을 개조해 뒷방에서 살림을 같이 하면서 거실에 방 여러 개를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치던 곳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피아노를 제법 잘 친다는 원장님의 사탕발림 때문이었는지 큰맘 먹고 피아노를 한 대 사주셨고, 난 집에서 열심히 연습하고 학원에서 칭찬받는 착한 어린이 었다. 열심히 하는 내가 믿음직해서 그랬는지 배가 고프셔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원장님은 나에게 혼자 연습을 하고 있으라고 해놓고는 식사를 하고 와서 레슨을 시작했다.
지금처럼 아메리카노가 전 국민의 음료가 되기 훨씬 전이라 사람들이 마시던 커피는 2-3-3의 맥심-프림-설탕의 믹스커피가 전부였다. 봉지에 든 커피믹스 스틱도 없었고 커피와 프림과 설탕을 각각 티스푼으로 뜨는 방식이다. (내가 왜 이걸 설명하고 있지? 그렇게 오래된 연식은 아닌데...) 원장님은 식사를 하시고 저 커피까지 한 잔 마시고 왔다. 조그만 방에 피아노만 달랑 놓여 있던 밀폐된 공간이었는데, 그 원장님은 절대, 단 한 번도, 방에 들어오기 전에 양치를 하지 않았다.
어디서 조금의 나쁜 냄새가 나면 코를 쥐어 싸는 내 아이가 분명 물려받았을 내 민감한 후각은 김치를 곁들인 평범한 식사 후에 믹스커피를 마신 그 입냅새를 매번 힘들게 참아냈다. 원장님의 입과 내 코의 거리가 30센티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 다 큰 어른이 돼서도 누군가에게 입냄새를 어떻게 지적해야 하냐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을 정도로 이건 아주 큰 실례임을 어린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당시 난 쇼팽의 녹턴이었나 마주르카였나 현란하게 손가락을 움직여야 하는 곡을 연주할 정도로 실력이 좋았는데, 도저히 그 원장님의 입냄새는 참을 수 없었다.
쇼팽의 녹턴이냐, 구취로부터의 해방이냐, 이 둘 사이에서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하다가 난 피아노학원을 그만뒀다. 그 이후로 내 피아노 실력은 시름시름 병을 앓으며 죽어가는 환자처럼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고, 중학교 2학년 음악시간에 피아노 실기시험에서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모두를 놀라게 한 연주를 마지막으로 숨을 거뒀다.
그 뒤로 단 한 번도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그때 원장님이 양치를 세심하게 하는 분이었다면 난 아이의 플루트 연주에 맞춰 피아노를 치며 하하 호호 행복한 가족을 연출하는 한층 더 멋진 아빠가 되어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누워서 배를 긁고 있으니 아이가 달려와 큰북을 치는 소리가 난다며 내 배를 두드리며 연주한다. 그래... 이걸로도 충분하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