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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결산

짧은 생각들

by 김알옹

10월엔 읽고 나서 바로바로 감상을 남겨놓으려고 애썼다. 이 정도면 흡족하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액스>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의 원작이라 영화를 보기 전에 소설을 먼저 읽었다. 초-중학생 시절에 부모님 몰래 읽던 시드니 셸던, 존 그리샴, 로빈 쿡 등의 통속소설을 다시 읽는 느낌에 그때의 재미가 다시 떠올랐다. 역시 범죄소설이 재밌어…


주인공의 살인행각에 독자가 정당성만 부여한다면 그때부터 희생자들은 그저 재미를 위한 제물에 불과하다. 작가는 이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무진장 애를 쓴다. 이력서도 공들여 작성하고, 가정을 끌어나가려는 가장의 독백과 고민을 보여주고, 마침 주인공의 가족은 사고를 치고... 그러면서 독자를 교묘히 주인공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작가의 설계에 넘어가면 재미있는 소설이고, 안 넘어가면 그저 그런 소설이다. 난 주인공처럼 내가 우리 가족의 주 수입원이기 때문에 몰입해서 재미있게 읽었다. 그렇다고 사람을 저렇게 많이 죽이는 건 반대지만.


영화는 연기력이나 미장센으로도 승부할 수 있으니 조금 더 용이하려나? 극장에서 내려가기 전에 어서 관람해야겠다.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 씨>, <악마를 보았다>, <박쥐>


리안 장 <J가 죽었대>

책 카피에 <급류> 정대건 작가가 강력 추천했다고 하는데, 진심?


정말 이 소설을 강력 추천했다면 난 그 작가의 소설을 앞으로 읽지 않을 거다.


초반엔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중반부터 갑자기 영화 <미드소마> 분위기로 전개되며 불쾌한 시궁창으로 독자를 끌고 들어간다. 소셜미디어의 도파민 홍수에서 탈출하고 싶어서 책더미에 묻혀 살고 있는데, 소셜미디어를 소재로 쓴 소설을 읽다니 마케팅에 속은 내가 바보다.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최악이며 시간 낭비이고 이 책을 만들기 위해 소비된 나무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지는 소설. (누군가에게 "이 소설 별로야. 나무가 아까울 정도."라고 했더니 "요새 e-book 읽지 누가 종이책 읽어요. 나무 안 써요."라고 트렌드에 뒤쳐진 늙은이 취급을 받았다.)


어지간한 도파민으로는 부족했는지 무시무시한 장면을 삽입해 놨다. 인스타 인싸가 되려면 별짓을 다 해야 하더라...


저 쥐를... 설명은 여기까지만 하겠다...


구병모 <절창>

이미 <파과>로 절대적 인기를 얻은 작가님이고, 이 <절창>도 분명 인기를 끌 작품이지만 난 약간 실망했다. 단편집 속 하나의 단편이 망하면 다른 단편으로 얼른 메꾸면 되지만 장편이 망하면 뭘로 메꿔야 하나요.


이야기의 개연성이 부족하다. 작가님 문장 잘 쓰시는 거 알겠는데, 서사가 별로인 내용을 문장으로 아무리 채워 넣어봤자 재미가 살아나진 않는다. 반전도 그다지 놀랍지 않고 '책'을 매개로 하는 설정도 별 매력 없다. 특히 처음부터 끝까지 쿨한 척하면서 결국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하고 남주에게 가스라이팅 당하는 여주의 수동적인 모습이 마치 어설프게 폼 잡는 마초 작가의 누아르를 보는 것 같아서 꽤나 불편하다. 그리고 미성년자끼리 처음 만나서 성인이 된 게 아니고, 미성년자 여주를 성인 남주가 그루밍하고 감금하는 내용인데 이거 문제없나?


- 어둠의 사업을 운영하는 재벌가 자식인 남주.

- 보육원에 있다가 우연히 남주에게 능력이 발견되어 남주에게 그루밍+가스라이팅을 당하며 감금당하고 능력을 갈취당하는 여주.

- 기타 선생님과 독서 선생님의 사연.

- 나름의 액션 장면.


가스라이팅 감금 스릴러라고 하니 넷플릭스의 <365일>이 떠올랐다. 물론 보지는 않았다... 야하다고 하지만 진짜 안 봤다...


스타일리시 비주얼 감금 초능력 로맨스라니 넷플릭스가 입맛을 다실 수도 있다. 하지만 뛰어난 문장을 쓰는 작가님의 소설이 영상으로 어설프게 소비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이 소설은 영상화하지 말았음 한다.


지금까지 쓰신 좋은 작품들을 믿고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본다.


문형배 <호의에 대하여>

우리 집 수건 중 가장 도톰하고 색깔이 예쁜 수건은, 아내가 2025년 4월 4일 윤석열 탄핵을 기념하여 친구와 제작한 진한 초록색 수건이다.


2025년 4월 4일 11시 22분을 기념하며

그날 재택근무를 하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판결 생중계를 보고 있는데 눈치 없는 상사가 전화해서 시답잖은 일로 시비를 걸어오던 기억이 난다. 20분가량의 긴 판결문을 읽느라 입 주변에 거품까지 살짝 낀 그 재판관님이 수줍은 듯한 표정으로 긴 시간 국민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사람을 비로소 끌어내리는 순간은 2025년 올해의 장면이 아닐까 생각한다.


피청구인의 법 위반행위가 헌법질서에 미친 부정적 영향과 파급효과가 중대하므로,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대통령 파면에 따르는 국가적 손실을 압도할 정도로 크다고 인정됩니다.

이에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탄핵 사건이므로 선고시각을 확인하겠습니다. 지금 시각은 오전 11시 22분입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이것으로 선고를 마칩니다.


그 재판관님이 펴낸 책을 읽었다. 그동안 20여 년간 블로그를 해오셨고, 거기에 올린 글 중에 120편을 골라 책이 만들어졌다. 1부는 판사 생활을 하면서 소소하게 느낀 점들과 자신을 가다듬는 글들과 나무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며, 2부는 독서 일기모음인데 주로 법과 관련된 내용으로 소감을 작성했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 판사님이라니!) 3부는 법원 게시판에 올린 글들로 사법부의 실제 현안에 대한 조금 어려운 글들이다.


최근 읽은 정명원 검사님의 <유무죄 세계의 사랑법>만큼의 유려한 글솜씨는 아니지만, 무뚝뚝하지만 마음이 따뜻한 경상도 남자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다. 평생 만 권의 독서를 하겠다는 목표를 응원합니다. 그런데 롯데자이언츠의 우승은… 잘 모르겠어요…


탄핵 판결문을 통해 평생 글로 이뤄야 할 영광은 모두 누리셨으니 은퇴 후 행복하게 등산과 독서를 계속하시면서 사회에 선한 영향을 끼쳐 주시면 좋겠다.


최이도 <메스를 든 사냥꾼>

연쇄살인범 아빠를 도와 함께 살인을 처리하던 딸이 아빠를 처리(…)하고 법의관이 됐는데, 처리된 줄 알았던 아빠가 다시 살인을 저지른다. 연쇄살인범의 딸이라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담당 형사와 함께 아빠를 잡으려 동분서주하는 법의관이라...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려낸 법의관은 항상 국과수 안에서 조용히 검시만 하는 사람들인데, 이렇게 살인사건 전면에 나서는 모습이 어색하다. 게다가 작품 전반에서 시종일관 불친절하고 차가운 태도를 유지하는 저 딸의 캐릭터가 아무 매력이 없어서 거슬린다. 작중 담당 형사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매력을 느끼는 것 같은데, 공감이 안 되니 인물 간의 관계가 잘 다가오지 않는다. 담당 형사 포함한 경찰 조직이 <살인의 추억> 시절의 허술한 경찰처럼 그려져서 이어서 읽는 내내 머릿속 물음표만 생겨난다.


다 읽는 데 딱 두 시간 걸렸다. 드라마가 있다는데 음… 재미없을 것 같다.



최원석 <복제약 공화국>

국내 제약사 연매출 40조 원, 다국적 제약사 연매출 10조 원, 국민건강보험 약품비 25조 원. 제약사 매출의 50%를 우리가 준조세 성격으로 납부하는 건강보험료가 책임지고 있는 이상한 나라.


다른 산업은 이 정도로 지원해 주면 세계정복도 해낼 거다.


정부가 투자를 장려하고 신약개발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심지어 이번 정부에서도 K-바이오가 중점사업에 포함되어 있다) 수십 년간 지원하고 있지만 국내 제약사들은 여전히 특허가 만료된 다국적 제약사 오리지널 약의 복제약만 팔고 있다. 한국 제약사가 개발한 신약이 전 세계에 팔린다는 뉴스는 셀트리온의 램시마, 유한양행의 렉라자 말고 들어본 적 없다. 셀트리온과 삼성바이오로직스? 그냥 글로벌 제약사 외주 받아서 내가 다니는 회사의 한 약품은 전 세계 매출액 10위 안에 드는 소위 블록버스터 약인데, 이 약이 한국에서 특허가 만료되자 무려 50여 개의 국내 제약사에서 복제약을 출시했다.


보통은 특허가 만료되면 복제약이 저렴한 가격으로 시장에 확 퍼지면서 오리지널 약들은 판매하지 않게 되는 구조가 만들어졌어야 하지만 우리나라는 복제약의 가격을 정부가 보장해 주면서 오리지널약도 계속 시장에 남아있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비등비등한 가격에 동일 성분인 복제약들은 병원의 처방이 간절하고 이는 리베이트로 이어진다. 국민들이 낸 건강보험료가 의사와 제약사 배만 불리는 셈이다.


왜 바이러스 때문에 생긴 가벼운 감기에 다음 약들을 처방하는 것인가.


- 항생제: 세균과 싸우라는 약인데 상대는 바이러스다. 세균 감염이 없어도 일단 처방하며, 5일 뒤에 아래 약들까지 다 먹으니 오히려 증상이 개선되지 않아 다시 병원에 가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른 항생제를 처방한다. 그렇게 항생제 내성이 증가한다.

- 항히스타민제: 콧물을 멈추라는 약인데 먹으면 졸리고 코-목의 수분이 모두 사라져 건조해진다. 가습기 틀어놓으라며 이래서 그런 거야?

- 진해거담제: 기침과 가래로 자연스레 몸에 나쁜 물질이 있으면 뱉어내야 하는데 다 막아버린다.

- NSAID 진통소염제: 비스테로이드성 진통제. 위장관 출혈의 부작용이 있다. 감기 때문에 어디가 아프지... 머리? 가슴? 마음?

- 위산억제제와 진경제: 저 약들을 때려박으니 위가 멀쩡하겠어? 위산도 덜 나오게 하고 경련도 멈추게 해야 하니 얘네들도 추가.

- 정장제: 항생제 먹으면 대장 내 균총의 균형이 무너져 설사가 나오니 장을 달래는 유산균 성분을 넣어준다.


며칠 따뜻한 차 마시면서 잠을 평소보다 많이 자고 코-목 점막을 촉촉하게 하면 며칠 안 지나 낫는 게 감기인데, 저렇게 많은 약을 먹을 필요가 있는지 우리는 궁금해야 한다. 제약사들이 동네 의원들을 돌면서 우리 약 처방 좀 많이 해달라고 리베이트를 주니까 처방을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거 다 우리가 낸 의료보험료로 감당하는 거다. 내가 낸 세금이(세금이라 치자)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알아야지.


성분명처방을 하면 개선될 거라고? 그럼 리베이트의 방향이 약사로 바뀌겠지..


그리고 의약 언론사 출신인 저자는 중구난방 난립한 의약 언론(대부분이 10명 이하의 소규모 언론사)들도 가차 없이 비판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복지부(+의료보험공단,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식약처) - 의료보험료 내주는 물주인 국민 - 엄청난 돈을 써서 신약을 만드는 다국적 제약사 - 이를 받아와서 복제약을 찍어내는 국내 제약사 - 이런 구조에 기름칠을 해주며 돈을 받아먹는 의약 언론은 '언론'의 기능을 전혀 못하고 있는 기생충과 같다고 한다. '국내 제약사와 우리 언론은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동료야!'라는 말을 지껄이는 언론인이라니... 그냥 홍보팀 아닌가?


저자는 복제약 가격을 확 낮추고 영세 제약사들이 자연스럽게 통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심지어 같은 공장에서 제조하고 라벨갈이만 해서 여러 제약사에서 팔리는 약품들도 있는 현실이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점점 약제비 비중이 커질 텐데, 의료보험재정 건전화를 위해 정부나 정치인이 한 번쯤 고민해 봐야 할 문제다. (하지만 의대 정원 문제에서 봤듯이, 이익집단의 강력한 힘 앞에서 우리 정부는 고개를 숙인다.)


마리-헐린 버티니 <외계인 자서전>

자신을 외계인이라 믿는 주인공. 어느 날 집 앞에서 주워 온 팩스로 고향 행성의 누군가와 소통을 시작한다. 주로 자신에게 발생한 사건들과 지구인에 대한 감상들을 보내놓으면 짧은 답장이 오는 방식이다. 가난에 찌들어 엄마와 둘이 빡빡하게 살지만 모녀는 어느 정도 행복하다.


주인공은 굳이 나누자면 아웃사이더에 가까운 학창 시절을 보내지만 친한 친구가 있어서 무사히 졸업한다. 졸업 후 뉴욕으로 떠나서 일하며 911을 겪는다. 팩스를 통한 소통은 계속되고, 출판계에서 일하는 친구의 추천으로 소통한 내용을 책으로 낸다. 그러는 와중에 친구가 암으로 죽게 되고, 뉴욕 생활을 함께 했던 강아지까지 죽게 된다. 이 장면들에서 외로움이 절절히 묻어난다.


소설이 좀 어수선한 면이 있지만, 외계인이 썼다고 생각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이해할 수 있다. 지구에 홀로 남겨져 지구인으로서의 삶을 헤쳐나가는 한 외로운 외계인의 자서전을 읽는 것이다.


라몬 파체코 파르도 <새우에서 고래로>

제목과 같이 강대국 사이에 낀 새우 신세의 약소국이었던 한국이 어떤 과정을 통해 발전하여 이제는 당당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게 됐는지 해방 이후부터의 역사적 사건들을 간략하게 조망해서 윤석열 정부까지 다다르는 개괄서. 저자는 스페인 사람인데 한국에서 오랫동안 공부한 한국 전문가이다. 사실 위주의 중립적인 관점으로 논쟁적인 사건들을 건조하게 서술하길래 아이에게 읽히려는 목적으로 빌려와서 내가 먼저 읽고 살짝 국뽕에 빠졌다. 내부자의 관점에선 문제 투성이인 이 나라는 대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사뭇 궁금해진다. 내 아이는 더 나은 세상에서 살면 좋겠는데…


김지연 <새해 연습>

김지연 작가님은 <조금 망한 사랑>에서 이미 느꼈지만, 조금 ’ 망한 ‘, 곧 오징어게임에 참가하기 직전일 것 같은 상태의 사람들을 소재로 조금씩 회복해 나가는 구조의 이야기 전문가인가 보다. 단편집을 읽을 때는 지루한 느낌이 들었는데, 한 편만 읽으니 이게 또 요즘 날씨와 무척 잘 어울린다. 뜨겁게 이글거리던 여름이 어제 같았는데 이제 아침에 집을 나서면 대기에서 겨울 냄새가 조금씩 난다. 읽으면서 이파리가 다 떨어진 나무들이 황량하게 모여있는 - 한겨울 제주도 (눈이 내리지 않은) 사려니숲길을 걸었을 때 가장 잘 느꼈다 - 숲을 걷는 느낌이었다.


특출 난 능력도 없는 여성 주인공은 중소기업을 다니면서 대표에게 '비밀이나 만들까?'라며 희롱을 당하고, 전세사기도 당하고, 결국 회사에서 해고당한다. 부모님은 이혼했는데 둘 다 죽었고,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고 지낸 하나 있던 할머니가 죽으면서 엄청난 양의 일기를 남긴다. 그 일기를 읽으면서 저런 일을 겪어내는 주인공은 그저 덤덤하게 남사친 한 명에게 아주 약한 유대의 감정을 갖고 버텨나간다.


서장원, 이유리, 정기현 <소설 보다 가을 2025>

계절마다 좋은 작품 세 편을 읽는 기쁨을 안겨주는 얇은 책, <소설 보다> 시리즈. 모든 작품이 대박을 치는 경우도 있고 둘만, 혹은 하나만 재미있는 경우도 있지만 셋 다 망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세 작품의 인터뷰를 진행한 평론가 중 한 명은 내 대학교 2년 후배다. 내가 3월에 입대하느라 신입생 OT를 따라가서 술을 엄청 먹였는데, 하도 많이 먹여서 토하길래 잘 챙겨줬던 모습만 기억하는 후배. 전공은 다른 쪽인데 평론가로 등단해서 교수까지 하다니 대단하다. (소설가를 직접 만나서 대화해 보는 점이 가장 부럽다)


셋 중 <두정랜드>가 좋았다.




서장원 <히데오>

일본에서 태어난 '히데오'는 집단 따돌림을 당하다가 한국으로 넘어와 예술학교를 다니며 연기에 재능을 발견한다. 작품의 화자는 그의 학교 선배로, 그를 좋아하지만 히데오는 그렇지 않다. 처음에는 화자에게만 알려주는 비밀이었던 히데오의 일본 시절 이야기는 점점 그가 인기를 누리면서 자신의 서사를 구성하는 에피소드로 활용된다. 아주 미세한 인물의 태도 변화나 감정 변화를 직접적으로, 혹은 작은 장치에 간접적으로 소설에 심어놓고 독자가 이를 발견하길 원하는 듯한 작품 구성이 썩 끌리지 않는다. 항상 함께 수록되는 인터뷰에서 평론가가 이런 장치들을 발견하고 질문하더라. 아 피곤하다. "오빠 나 뭐 변한 거 없어?"라는 밈 생각이 난다.


'젊은작가상'이 좋아하는 이 작가님은 아주 강하게 퀴어 쪽으로 인물을 구축해 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번엔 LGBTQ 중 아무도 해당되지 않는 인물이 등장해서 오히려 놀랐다. (준비 중인 장편소설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죽은 젠더퀴어 소년의 죽음을 쫓는 어머니 이야기라고 한다.) 대체 작가님의 성별이 뭔지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찾아봤더니 여성이었다. 퀴어들 사이에선 남-여의 이분법이 아닌 다양한 성별 구분이 있던데(그것이 바로 젠더퀴어라고 한다) 작가님은 내 느낌에 성별만 여성이고 젠더는 뭔가 복잡할 것 같기도 하다. 철학을 공부하다 그만두고 23세에 서울예대 문창과에 재입학한 후 졸업하고는 한예종 서사창작전공 전문사를 전공했다고 한다. 글 쓰는 재능이 있는 사람인가 보다.



이유리 <두정랜드>

'두정'이라는 가상의 지방 도시를 배경으로 '두정랜드'라는 놀이동산에서 알바를 하는 젊은 처자가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함께 일하는 연두라는 동료에게 자신이 서울 대학생인데 휴학하고 학비를 벌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매주 서울에 가서 홍대와 연남동을 돌아다니며 서울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을 채운다. 그리고 다시 두정랜드로 돌아와서 연두를 비롯한 두정의 모든 것들을 멸시하고 서울만을 동경한다. 그러나 자신의 가면이 벗겨지게 되면서 주인공은 삶의 방향을 잃는다. 현재의 우리나라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차별 문제를 다뤄보려고 애쓴 작품이다. 시종일관 서울에 대한 열등감과 동경으로 똘똘 뭉친 평면적인 속물 캐릭터는 오랜만에 만난다. 신선한걸?


70미터에서 떨어지는 롤러코스터를 안내하는 주인공이 수없이 읊어대는 멘트다.

짜릿한 모험의 세계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사악한 괴물 크리갈이 쳐들어와 공주를 납치하려는 절체절명의 순간 여러분은 크리갈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할 수 있을까요 크리갈의 침공 지금 출발합니다

어디서 들어본 내용이라고 생각했는데 경주월드에 다녀와서 소재를 얻었다고 작가 인터뷰에 언급되어 있다. 경주월드! 롯데월드는 코웃음이 나고, 에버랜드는 늙었고, 이제 대세는 경주월드다. 작년 가을에 아이와 둘이 경주월드에 가서 무시무시한 어트랙션들에게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경험을 해보고 나서, 나의 노화를 다시금 느꼈던 기억이 난다. 어릴 땐 T익스프레스를 몇 번씩 타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경주월드 드라켄과 크라크를 타고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50미터 높이에서 거꾸로 매달려 3초 정도 멈춰서 땅과 나 사이엔 안전바 하나만이 추락을 막아주는 크라크 위에서 난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여기 매달려 있는지 잠시 고민했다. 작품 중에 '롤러코스터는 안전한 임사체험'이라는 표현에 무릎을 탁 쳤다. 그렇다. 롤러코스터가 아니라면 우리가 언제 그런 높이에서 추락하는 체험을 해보겠는가.


으악 왜 공중에서 멈춰! 경찰 불러!

정기현 <공부를 하자 그리고 시험을 보자>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는 중학교 3학년 여학생. 하루에 13시간을 공부하고 딱 2시간만 스트레스를 푼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남자친구가 있는데, 둘은 섹스도 하고 영화도 본다. 그러다 재미있는 놀이랍시고 사람들이 다치지 않을 만한 - 먹다 남은 죽을 작은 비닐봉지에 엄지손가락만큼 넣어서 7층 높이의 아파트에서 던져 행인들을 맞춘다. 그러다 학교 일진들을 맞추고, 공부를 잘하는 주인공은 엉겁결에 일진의 무리에 합류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전교 1등은 놓치지 않는다.


전작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을 읽고 '뭐 이런 나사 빠진 작가가 있지...'라는 생각을 했다. 어딘가 엉성한 구성과 엉성한 인물과 엉성한 서사. 작가 인터뷰를 보니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던 이것과 저것을 나만의 논리대로 이어 보기'라는 방법이 삶을 조금이나마 재미있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한다. 그 '나만의 논리'가 이해가 안 되니까 저런 생각이 드나 보다.


내 아이가 얼마 안 있으면 저 나이대가 돼서 그런가? 요즘 중학교 3학년이 섹스하는 건 이제 독일이나 네덜란드처럼 당연히 벌어지는 일인가? 하교 후 남자친구의 집에서 매일 섹스를 하는데 부모란 인간은 왜 모르나? 그런데 쟤네들 피임은 제대로 하고 있나? 7층에서 창밖으로 뭘 던지는 걸 정말 놀이라고 생각하고 작품에 넣은 건가? 주인공 여자애가 공부도 못하고 그냥 평범한 아이 었어도 과연 이런 전개가 가능했을까? 공부만 잘하면 무슨 짓을 해도 다 괜찮은 거야? 일진이랑 어울려서 놀았으니 외고 시험 망치는 걸로 균형이 맞춰진다는 설정이야? 일진 미화. 베란다 물건 투척 미화. 만 15세끼리의 성관계 미화. 이거 지금 내가 다 이해하면서 소설을 읽어야 하는 건가? 이런 걱정하는 내가 꼰대인 건가? 작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소설을 썼고, 이 소설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질문을 던지는 평론가와 떡하니 책에 수록한 출판사는 이게 괜찮다고 생각한 걸까? 다 정상인데 나만 예민하게 구는 건가?


찰스 J.헨리 <고스트 플레임>

스무 명의 한국전쟁 관련 인물들의 이야기를 회고록, 전기, 일기, 편지, 한국과 미국에서 진행된 개인 인터뷰, 기밀 해제된 기록문서 및 기타 자료 등 다양한 출처에서 발췌해 한국전쟁 전체를 그려낸 역사서. 작가는 미군이 1950년 7월 말, 노근리 근처에서 250여 명의 양민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1999년에 세상에 알려 퓰리처상 탐사 부문을 수상한 AP통신의 대기자이다.


제목인 'Ghost Flame'은 저자가 한국의 시골 사람들이 대량 학살의 현장에서 혼불이 깜박이는 것을 봤다는 말을 듣고, 이 전쟁에서 죽어 편히 잠들지 못하고 떠도는 영혼을 위해 붙였다고 한다. 이 책의 부제인 <한국전쟁의 은폐된 삶과 죽음>과 같이 숨겨진 진실을 조망하며 수많은 희생을 추도한다. 미국인이 쓴 책이지만 남한, 북한, 미국, 중국, 러시아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중립적인 관점을 유지하며, 각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쟁의 긴 흐름에 엮어나가는 서술방식이 6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을 단숨에 읽게 도와준다.




노근리 학살에서 두 아이를 잃은 생존자 박선용, 북에서 태어났지만 남으로 내려와 이리저리 피난을 다니던 10대 소녀 장상(추후 이화여대 총장이 된), 중국과 북한을 오가며 미그기로 수없이 많은 공중전을 거친 북한 공군 조종사 노금석(정전 후 1953년에 미그기를 몰고 남한으로 귀순), 노근리 학살에서 무고한 양민들에게 방아쇠를 당기고 그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미군 장병 버디 웬젤, 북한 고위 군사 지도자 유성철(정전 후 얼마 안 돼 숙청), 중국 인민군 사령관 펑더화이(문화대혁명 중 숙청), 전투 중 포로로 억류되어 있다가 공산주의에 감화단 미군 흑인 장병 클래런스 애덤스, 치열한 고지전들을 거치며 영웅적인 활약을 통해 훈장을 받지만 한국전쟁에 회의를 품은 미군 장교 피트 맥클로스키, 지리산 빨치산으로 긴 시간 활동하다가 결국 사로잡혀 최장기 미전향 장기수가 된 북한 공산주의자 리인모, 하버드를 그만두고 조국을 위해 귀국하여 2년 동안 끌어온 정전 협의 막판에 투입되어 통번역을 맡은 엘리트 중국인 지자오주, 맥아더를 이어 한국전쟁을 지휘한 미군 사령관 매튜 리지웨이, 10대 후반의 의사를 꿈꾸는 소년이었으나 전쟁을 거치며 어른이 된 국군 위생병 정동규, 의학박사임에도 종교적 사명으로 피난민이 1백만 명 넘게 몰린 부산의 열악한 의료환경을 개선하려 애쓴 수녀 메리 머시(부산 메리놀 병원의 초대 원장) 등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3년 4주 4일간의 치열한 한국전쟁을 풍성하게 그려냈다.



각 인물들의 나이는 1950년 6월 25일 기준이다. (출처: 19p~23p)


모 집단에게 '국부'라 추앙받는 이승만은 전쟁 발발 직후 한강교를 폭파시키며 서울에 남은 자들을 북에 희생시키거나 협조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보도연맹 사건 등을 통해 자국민을 죽이라는 명령을 서슴없이 내린다. '흰 옷 입은 사람들을 정리'하라는 미군의 작전에 뭐라 항의하지도 못하고, 전쟁 후반엔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해 홀로 북진통일을 주창하며 정전이 지체된다. (물론 정전협상은 미군과 중국군이 포로 교환 및 휴전선 문제로 지체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인데, 협상 시작 후 무려 2년이 걸렸다. 2년 동안 희생된 인명은 셀 수 없다.)


1차대전의 참호전도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킨 끔찍한 형태의 전투 양태이지만, 한국전쟁의 고지전 또한 전세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자고 일어나면 고지의 주인이 바뀌어 있을 정도로 군사를 쏟아부으면서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킨다. 러-우 전쟁에서 보듯이 현대전은 드론을 사용하는 고도화된 전투를 치르지만 여전히 보병을 투입해서 화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우리 국토를 전장으로 한 전쟁이 또다시 발발한다면 아무리 현대전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민간인의 희생이 동반되는 인명피해는 불가피하다. 엄연히 '주적'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체제가 붕괴될 조짐이 아직 보이고 있지 않지만, 언제 어떤 방식으로 전쟁이 또다시 벌어질지 모른다. 국제적으로는 '잊혀진 전쟁'이라 불리는 한국전쟁. 직접 경험하지 않는 젊은 세대에겐 <국제시장>이나 <태극기 휘날리며>등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신파만 남는 영화를 통해 그 비극적 역사가 폄하되기도 하지만, 남북한 민간인만 2백만 명이 넘게 죽은 끔찍한 전쟁의 기억은 어떻게든 잊혀지지 않아야 한다.



김애란 <비행운>

최근에 동네 도서관에서 작가님의 <이중 하나는 거짓말> 북토크가 열려서 다녀왔다. <안녕이라 그랬어>도 출간된 지 얼마 안 된 터라 풍성한 이야기들을 1시간 30분 동안 들을 수 있었다. 소설의 뒷이야기와 작가님의 해석, 좋은 질문과 답변이 이어지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작가님은 정말... 눌변인 듯 달변이고, 심각한 듯 유머러스하며, 단어 하나 말 한마디를 고심해서 꺼낸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애란 작가님은 앙다문 입술처럼 맺고 끊음이 확실한 문장을 말씀하신다.




예전에도 좋아했지만 더 좋아지게 된 작가님의 작품 중 안 읽은 게 뭐가 있는지 찾아보고는 <비행운>을 읽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서 도서관의 손때 묻은 책을 빌려왔다. 13년 전에 발간된 책이라 꼬질꼬질해져서 그런지 대단한 고전을 읽는 기분도 들었지만 13년 전 난 이미 30대 기혼남... 나야말로 늙었다. 마치 우리가 양귀자, 박완서 선생님의 과거 작품들을 읽을 때 어떤 작품들은 '진짜 다른 시대구나'라는 인상을 받는 것처럼(아들을 낳지 못해 자책하는 여성의 모습과 같은), 흘러간 옛이야기 느낌이 드는 작품들이 있었다.


동남아 여행에서 갈등하는 두 친구(<호텔 니약 따, 2011>), 단지 네일 하나 받은 걸로 엄청난 자기 관리를 한 것처럼 느끼는 젊은 처자(<큐티클, 2008>)와 같은 이야기들은 고작 15년 전 소설인데도 등장하는 소품들이나 사회상이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벌써 촌스럽게 느껴지는 15년 전 인물이라니... 다양한 문학상 작품집이나 최신 소설들을 찾아 읽다 보니 '지금'을 보는 내 감각이 발달했는지도. 나머지 작품들은 2025년에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세련된 주제의식을 보여준다. 2000년대 후반-2010년대 초반의 사회상이 어땠는지 나중에 누가 물으면 이 책을 추천해 주겠다.




당시엔 이명박의 뉴타운 정책 때문에 재개발되는 곳이 많았다. 조세희 선생님이 그려낸 재개발의 모습이나 김애란 작가님이 그려낸 재개발의 모습 모두 삶의 터전을 잃었거나 잃을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겪는 비극적 상황을 잘 그려냈다. <물속 골리앗>이란 작품은 읽다 보면 창밖에서 끝없이 내리는 빗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자연재해 앞에서 이웃이나 공권력으로부터 버려진 주인공이 어디까지 몰리는 상황에 이르는지 잘 보여준다. 끝없이 내리는 비의 묘사는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벌레들>은 '장미빌라'라는 재개발구역 앞 홀로 남은 낡은 빌라에 사는 임신부가 마치 재개발 구역의 낡은 집들이 무너지는 것처럼 자신의 생활이 무너지는 상황을 그려냈다. 날이 갈수록 점점 커지는 소음과 벌레의 크기가 삶을 침잠해 가는 과정을 정말 잘 묘사했다.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는 사랑을 잃는 슬픈 이야기다. 항상 사고만 쳐서 집안의 골칫거리인 용대는 흘러 흘러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택시기사로 일하고 있다. 모두가 그를 홀대하지만 조선족인 명화는 그를 보듬아준다. 둘은 조촐하게 살림을 차려 행복을 맛보려 하는데, 명화는 그만 불치병에 걸린다. 인생의 바닥에서 겨우 찾은 희망이 사라져 버린 용대는 명화가 남긴 중국어 녹음테이프를 따라 하며 덤덤히 택시를 운전한다. 영화 <파이란>과 소설 <운수 좋은 날>을 섞어놓은 느낌이랄까. 가끔 타는 택시에서 담배 쩐내가 나고 거친 운전과 뜬금없는 정치 얘기에 시달릴 때 기사님에게도 용대와 같은 사연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상상할지도 모르겠다.


<하루의 축>은 50대 중반 여성인 인천공항 비정규직 청소노동자가 가난과 탈모에 시달리고 공항 이용자들이나 관리자들에게 무시받으면서도 하나뿐인 아들에게 애정을 쏟지만, 그 애정이 배신당하면서 멘털이 무너지는 이야기다. <서른>은 주인공이 노량진에서 함께 공부하던 공시생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을 띠고 있다. 재수 후 불문과에 입학했으나 취업이 안 돼서 학원강사를 하다가 다단계회사에 들어간다. 겨우 예전 학원 제자를 '소개'해서 다단계에 밀어 넣고 탈출하게 됐지만 그 제자에게 나쁜 일이 일어난다. 두 작품 모두 작가님이 인물을 그리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공항 청소노동자의 생활과 노량진/다단계회사의 현실을 조사했을지 알 수 있다.




작가님은 그때도 사회학자고 지금도 사회학자다. <안녕이라 그랬어>와 <비행운>을 비교해서 읽어보면 십여 년 간 세상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알 수 있다. 놀라운 점은 <안녕이라 그랬어>에서 작가님 또한 변화, 아니 진화해서 요즘 젊은 작가들의 세련된 감각에 전혀 뒤처지지 않고 오히려 더 날카롭게 가다듬어져 있다는 것이다. 2035년에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으면서 또 이와 비슷한 감상을 쓸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



이주혜 <여름철 대삼각형>

이 이야기는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다.


첫 문장부터 강하게 시작한다. 서문의 끝에서도 아래와 같은 설명으로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몹시 기대하게 한다.


이야기가 인물이고 배경이고 사건이다. 이야기가 머리고 몸통이고 꼬리다. 그러나 이 이야기 안에서 당신이 만날 이야기가 마침내 어떤 모습을 띠게 될지는 나도 당신도 알 수가 없다. 우리는 그저 선택될 뿐이다.


두 번의 유산을 거치고 아이 갖기를 포기했는데 남편이 바람이 나서 이혼한 태지혜, 할머니의 손에 자라 구애하던 남편과 결혼해 딸 하나가 있는데 그 딸이 대학에 들어가면서 독립하겠다고 속을 긁어 속상한 송기주, 재벌 사모님의 운전기사로 일하며 가족보다 사모님에게 더 충성한 아버지를 둬서 큰 상처를 받았고 학원강사로 일하면서 어머니 사후에 아버지와 같은 집에 살지만 마주치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는 반지영. 우리 곁에 있을 법한 40대 여성 세 명의 이야기가 탐스러운 삼색 설탕을 넣어 통 안에서 빙빙 돌면서 영롱하게 빚어지는 솜사탕처럼 펼쳐진다. 책의 중반부까지는 세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진 않는다. 작가님이 서문에서 자신 있게 말한 대로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정말 제목대로 '여름철 대삼각형'의 각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여름의 대삼각형: 데네브, 알타이르, 베가 | 출처: Star Walk


태지혜의 전남편의 누나 성희에게 우주라는 딸이 있는데, 어느 날 이 아이가 임신했다며 가출하여 태지혜의 집에 머물며 중절수술을 받는다. 그리고 갑자기 세 여자가 사실은 우연한 계기로 만나서 단톡방에서 서로 온라인상으로 교류하는 관계였다는 설정이 등장하고, 태지혜-우주-송기주-시오-반지영 다섯 명이 갑자기 전라도 무주로 반딧불이를 보러 여행을 떠난다. 각자 사연이 있는 등장인물들은 여행 중에 서로 울고 웃으며 각자의 갈등과 상처를 치유해 나간다. 무주의 여행 프로그램 중 별자리 관측에서 함께 관측한 여름철 대삼각형은 베가(거문고자리의 가장 밝은 별. 직녀성) - 알타이르(독수리자리의 알파성. 견우성) - 데네브(백조자리의 알파성)를 이은 삼각형이다.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인 각 인물들의 이야기를 삼각형으로 이어주는 목적으로 등장시켰겠지만, 좀 작위적이었달까. 셋이 합체(?)하면서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설탕들이 섞여서 까만색이 되어버린다.


이야기들이 빛을 잃고 평범한 연대와 치유의 이야기로 변모해서 좀 실망하며 결말까지 이르렀는데, 갑자기 2024년 12월이 등장하고 이들은 여의도 앞에서 윤석열 퇴진을 함께 외치며 더 공고한 관계를 다져나간다. 물론 우리가 그 계엄 때문에 전국민적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점은 인정하고, 소설은... 그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 소설가의 책무지...




이 소설은 셋이 만나기 전까지의 이야기만 참 좋았다. '연대'가 당면한 여러 사회문제들의 해결책이 될 수는 있겠지만, 소설 안에서는 만능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이야기들이 지나가고 나니 남는 건 '무주 여행이나 한 번 가볼까?'라는 생각뿐이다.



고광욱 <임플란트 전쟁>

언젠가 추천받은 책인데 마침 생각이 나서 빌려왔다. 현직 치과의사가 본인이 직접 겪은 치과의사들의 임플란트 가격 담합 문제와 이를 거부하며 싸워온 자신의 10년 간의 이야기를 소설 형식으로 꾸려냈다. 치과업계의 부조리와 치과의사협회의 민낯을 폭로하며 긴 시간 싸워오다가 사이다 엔딩으로 끝난다.


정말 온갖 부조리와 비논리가 난무한다. 모두 개인사업자인 주제에 임플란트 가격을 현실화해서 받는 치과들을 '영리병원'이라고 비난하면서(서울의료원, 국립의료원, 경기도의료원 등의 병원이 비영리병원인데, 그럼 영리병원이라고 비난하는 본인들은 저가로 진료해서 이익도 하나도 안 보는 사회활동이라도 하시나... 다들 벤츠 타고 다니시던데...) 소송비용과 언론플레이를 위한 모금을 통장도 없이 현금으로 수금하고, 이 중 일부를 착복해서 정치인 비자금으로 쓴다. 물론 치과의사협회에 기생하는 치과 언론들은 나쁜 병원이라며 나팔을 불어댄다. 치과 치료 자재 공급 업체의 팔을 비틀어 '영리병원'들에게 자재 공급을 중단시킨다. 의사면허와 전문지식을 인증해야 글을 쓸 수 있는 협회 익명게시판엔 환자 블랙리스트를 공유하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악플을 단다. (이건 일베가 하던 짓 아닌가) 그들은 대학교 시절부터 국시 문제를 유출시켜서 서로 공유하고 이 비밀을 자기들끼리 지켜낸다. 월매출이 3천만 원이어도 자기 생활비(리스차량 포함)와 치과 운영비용을 제외한 순수익을 자기의 수익이라고 한단다 허허허... 그렇지 않아도 항상 궁금했다. 월급쟁이 회사원들은 연봉을 세전 금액으로 말하는데, 의사들은 꼭 세후 금액이나 자기 손에 쥐는 현금을 말하더라.


영리병원을 걱정하는 고귀한 분들. 다들 사업자는 안 내셨죠? (출처: 덴탈투데이 “영리치과 과잉진료…국민들 허리 휘청”)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싸움을 이어가는 주인공을 절로 응원하게 된다. 작중 어느 치과의사에게 일갈하는 대사가 딱 작가님이 하고 싶은 말로 보인다.

벤츠 타고 출근하면 잘되던 진료가 그랜저 타면 잘 안 됩니까?


힘과 의지와 도와주는 친구와 동료 의사들이 없었다면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을 것 같다. 찾아보니 저자 고광욱 님은 그 유명한 '유디치과'의 대표원장이다. 임플란트 가격을 현실화시킨 일등공신이다.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을 이렇게 잘 읽히는 소설로 쓸 수 있다니, 글 잘 쓰는 사람은 어느 분야에 있던지 빛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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