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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 Mar 29. 2020

Black Swan&Whiplash

우리는 정말 완벽해질 수 있을까, 그 ‘완벽함’이란 무엇일까.

Psychological film special ②


 뭐든 다 잘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을 갖고 산 적이 있었다. 날카롭고 항상 긴장된 상태를 유지한다. 잘한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 한 가지에 몰두할 때, 완벽에 가까워지려 할 때, 에너지를 쏟는 만큼 피폐해진다. <블랙스완>의 니나와 <위플래쉬>의 앤드류는 완벽을 탐하고 결국 이루어낸다. 그러나 그 둘의 결말은 달랐다. 결말이 같았더라면 쉬웠을 텐데, 다른 결말에 의문이 생기고 만다. 우리는 정말 완벽해질 수 있을까, 그 ‘완벽함’이란 무엇일까.


 <블랙스완>과 <위플래쉬>는 자주 동일선상에 놓여 회자되는 영화로, 예술적 완벽함에 대한 메타포를 담고 있다. 그러나 완벽을 향해가는 두 캐릭터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두 영화의 오프닝을 살펴보자. <블랙스완>에서 백조를 연기하는 니나는 곧 악마에게 조종당한 채 연기를 이어가는 꿈을 꾼다. <위플래쉬>는 까만 화면에 오프 사운드로 강한 드럼 소리가 삽입된다. 소리가 멈추면 연습실에 있는 앤드류가 보인다. 니나는 연약하고, 앤드류는 드럼 사운드처럼 강하다. 그런 두 인물이 완벽을 향해가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장애물도 매우 상반된다. 다시 한번 오프닝을 상기시켜 보자. <블랙스완>에서 보여준 ‘꿈’이라는 것 자체는 인간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환영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영화 전개 내내 니나는 환각으로 보이는 나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나간다. 그렇다면 <위플래쉬>는 어떤가. 드럼을 치고 있는 앤드류에게 카메라가, 아니 플랫처가 천천히 다가간다. 플랫처는 연주를 지시하고, 앤드류는 따르기를 반복하며 씬이 마무리되는 것처럼 앞으로의 전개는 앤드류와 플랫처의 관계를 중심으로 나아갈 것임을 알 수 있다. 앤드류는 완벽을 향해 가는 길에서 플랫처와 싸워야 한다. 니나가 스스로를 억압하며 완벽을 향해 나아간다면, 앤드류는 플랫처에게 억압당하며 완벽에 만전을 기한다.


“그저 완벽해지고 싶을 뿐이에요.”

 발레 단원들은 늙어가는 수석 무용수 ‘베스’를 비웃지만 니나만은 그렇지 않다. 니나는 그녀를 훌륭한 무용수라고 칭한다. 베스가 화가 나 대기실의 물건들을 다 내팽개치고(그녀는 이미 새 쇼의 주인공이 바뀔 것을 알고 있다) 나오자, 그녀를 지켜보던 니나는 곧 베스의 대기실로 들어가 그녀의 립스틱을 훔친다. 베스처럼 완벽해지고 싶던 니나는 그녀의 물건을 훔치면서까지 그녀처럼 되고 싶다. 그리고 그녀는 점점 스스로를 파멸시켜 병원에 입원한 베스처럼, 그녀를 닮아간다. 그리고 니나는 모든 동작을 완벽하게 해내려는 집착과 동시에 자기를 잊고 몰입해야 한다는 토마스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노력하면서도(그녀의 자위행위, 자의는 아니었으나 엑스터시 복용 등) 자신을 옭아매는 공연에 대한 압박에 따른 환각에 자신을 주체하지 못한다. 마침내 <Swan Lake>의 공연 당일 날, 니나가 찌른 것이 릴리가 아닌 니나 자신이었음을 알게 될 때, 그리고 그렇게 공연장에서 눈을 감아갈 때, 베스가 니나의 미래였음을, 그리고 완벽함을 추구하는 일이 어느 정도의 고통인지 우리는 알게 된다. 


“서른넷에 비참하게 죽지만 오래 회자되는 게 아흔 살까지 심심하게 살다가 잊히는 것보다 낫죠.”

 한편 <위플래쉬>의 앤드류는 니나처럼 연약하지 않다. 가족끼리 모인 자리에서 모든 말에 방어를 하며 자존감 100%의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면, 독설가 플랫처 앞에서도 나중에는 철판을 깐 얼굴로 맞대응이 가능해질 정도니까. 그러나 완벽에 향하는 길은 누구에게나 비슷한 것처럼 그도 그 스스로를 통제하고 학대한다. 피가 나도 계속해서 드럼을 연주하고, 플랫처가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본인에게 심한 욕도 서슴지 않는다. 자동차 사고가 나도 공연장에는 가야겠다는 그 의지. 그리고 그는 피가 철철 흐르는 손으로 연주를 마무리한다. 그 연주 이후 앤드류는 플랫처의 전 제자가 사실은 차 사고가 아닌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듣고 그의 변호사 앞에서 플랫처의 악행을 증언한다. 그리고 몇 달 후, 드럼을 포기한 앤드류는 우연히 클럽에서 재즈 공연 중 피아노를 연주하는 플랫처와 만나게 된다. 


 니나가 베스와 닮았던 것처럼, 앤드류는 사실 생각해보면 플랫처와 많이 닮아 있었다. 심벌즈를 맞고 그 계기로 천재가 되었다는 찰리 파커를 그의 영웅으로 생각하며 플랫처의 강압적이고도 난폭한 교육 방식을 그대로 따르던 앤드류의 모습은 플랫처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렇게 영화 초기 플랫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그의 가르침에 따르던 앤드류는 이후 클럽에서 만난 플랫처가 셰이퍼를 나온 이야기를 하며 그의 예술적 사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선은 지켜야죠. 너무 세게 몰아붙이면 제2의 찰리 파커도 좌절할 거예요.”라며 그의 말을 맞받아 친다. 드럼을 관두고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여유라도 생긴 것일까. 우린 여기에서 앤드류의 변화를 보게 된다. 


두 영화는 비슷하지만 상반된 결말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Requiem for a dream>에 관한 리뷰에서 나는 ‘과함은 언제나 대가를 따르기 마련이다.’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다음 리뷰로 이 두 영화를 선택했다. 이 두 영화는 ‘과함은 언제나 대가를 따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면서도 큰 차이를 보이는 지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결말부인데, 블랙스완이 비관적 엔딩으로 끝을 맺는 반면, 위플래쉬는 지속되는 갈등 끝에서도 해피엔딩의 모습을 띤다.

 <블랙스완>의 장르를 ‘psychological horror film’라고 명명하고 그 영화가 인간의 완벽에 대한 심리가 어떻게 한 인간을 파멸로까지 이르게 하는지에 대한 메타포라고 볼 수 있는 반면 <위플래쉬>의 장르는 한 소년의 ‘성장 드라마’ 정도로 봐도 무관하다.(물론 이걸로 영화의 수준을 따지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꿈을 위해서는 언제나 이기적이고 강박적으로 행동했던 앤드류는 어쩌면 플랫처가 있었기에 플랫처 같은 어른으로 성장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만으로 가득했던 그는 드럼을 포기한 후에야 후반부 플랫처와의 대화에서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플랫처와 함께 하게 된 재즈 공연에서, 앤드류를 곤란에 빠지게 하는 플랫처의 장난에도 불구하고 앤드류는 굴하지 않고 단원들에게 사인을 보내 공연의 흐름을 바꿔 완벽한 드럼 연주를 선보이며 극의 막을 내린다. 그것은 그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여유를 되찾은 이의 ‘완벽’이었다. 

 전자는 예술적 ‘완벽’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그에 따른 심리적 압박, 대가의 엄청남, 그 후에야 오는 예술적 완벽을 보여주고 있다면, 후자는 그러한 압박이 언제나 완벽을 만들어내진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두 영화를 모두 살펴본 후, 앞서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어떻게 내리고 싶은가? 무엇을 봐도 어려운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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