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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 May 07. 2020

사냥의 시간(2020)

그들이 벗어나야 했던 그 지옥은 어떤 지옥이었을까 :결론나지 않은 이야기


 윤성현 감독이 2010년 <파수꾼>을 들고 영화계에 발을 들인 그 시간을 기억한다. 그리고 우리는(적어도 나는) 그의 차기작을 매우 기대하며 기다렸다. 그 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등장한 그의 두 번째 장편에 대해 말할 시간이 왔다. 


 영화 오프닝, 카메라는 기훈과 장호를 따라 뿌연 도시를 훑는다. 한국 영화에서는 쉽게 보지 못하던 디스토피아 세계를 트래킹 샷으로 훑어내며 음악과 함께 세련되게 표현해 낸다. 혹자는 <사냥의 시간>에서 <매드 맥스>가 떠오른다 하였으나, 영화 전반의 톤에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칠드런 오브 맨>(2006)의 향이 진하게 배어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에 대한 기대는 한껏 높아졌다.

 어두운 도시를 지나 기훈과 장호는 교도소 앞에서 출소하는 준석(이제훈)을 기다린다. 3년 만의 재회에서 그들은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을 얘기한다. “에메랄드빛 해변에, 야자수 나무 있고 햇빛 쨍쨍하고, 하와이와 비슷한 곳. 한 달에 8천 불 이상을 버는 곳.” 그들이 갈망하는 유토피아로 향하기 위해 그들은 다시 마지막이 될 범죄를 저지르고자 한다.

 기훈, 장호, 제훈에 마지막으로 상수까지 합세해 불법 도박장을 터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내 살인 청부업자인 ‘한’에게 쫓기며 본격적인 ‘사냥의 시간’이 시작된다. 여기까지, 너무나도 순탄하고 정석적인 플롯이다. 우리는 앞으로 이 네 청년들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영화는 앞서 뿌려놓은 장치들을 주워 담으며 서사를 마지막까지 잘 마무리해야만 한다.

 단 두 편의 장편 영화를 완성했지만, 감독에게는 ‘부모의 부재’가 어떤 중요한 의미인 듯하다. <파수꾼>의 엄마 없는 기태에게 친구들은 가족의 역할을 해 주었다. <사냥의 시간>에서 준석과 장호는 이미 부모가 부재한 상황이고, 기훈과 상수는 지켜야 할 부모가 존재하지만 모두 부모를 지켜내는데 실패하고 만다. 또한 영화 결말부에서 그려지는 준석의 자전거 가게에서 보이는 네 친구들의 사진은 한국의 준석의 자전거 가게에서 드러난 돌아가신 준석 엄마의 사진을 떠오르게 하면서, 사실상 ‘가족사진’을 그려낸다. 그리고 이제 준석은 모든 가족(친구)을 잃었다. 그러나 영화는 의미심장한 장치들을 심어놓고 주워 담기에 실패했다. 감독이 중요시했던 ‘가족’과 사냥자 ‘한’은 어떠한 연결고리로도 이어지지 못하고, 장호의 옷 뺏어 입는 행위, 자는 척, 천식과 같은 작고 디테일한 설정에 대해서도 그는 끝까지 설명하길 거부했다. 친절하게 설명해주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예상은 가능하게 풀어냈어야 했을 디테일들을 철저하게 배제시켰다. 또한 영화에서 인물의 등장과 퇴장이 너무 가볍게 이루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박정민이 연기한 ‘상수’는 과거 준석의 돈을 가지고 도망간 인물이자 도박장에서 웨이터로 일한다는 명목으로 준석이 판을 짠 도박장 절도에 합류하게 된다. 이후 절도에 성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에게 붙잡혀 죽음으로써 그의 역할도 명을 다한다. 이러한 상수 캐릭터를 보고 있자면, 상수의 존재가 유의미하긴 했던 것일까 의문감이 든다. 그저 도박장의 루트를 알고 있는 존재로 쓰이고 버려지는 캐릭터였을까. 물론 상수는 준석의 꿈에서도 등장 비중이 높다. 한이 상수를 죽인 이후, 혹은 아마 죽일 시점에 준석은 ‘불꽃놀이를 하다 그 불꽃이 총이 되어 상수를 향하는’ 꿈을 꾼다. 이후 영화는 본격적인 한과 남은 아이들의 추격을 진행시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준석은 장호가 입원한 병원에서 상수의 꿈을 한 번 더 꾸게 되는데, 준석이 핏물을 헤쳐 상수 앞으로 가자 상수는 준석에게 일어나라고 말한다. 그 즉시 잠에서 깬 준석은 병원 1층에 멈추는 한의 차량을 보고 또다시 추격전의 먹잇감이 되어 사건은 진행된다. 그러나 예언의 신호로 꿈이라는 장치를 이용한 것 역시 너무 쉬운 구성으로 보여 아쉬움이 남는다. 


 조성하가 연기한 봉식과 봉수 캐릭터 역시 마찬가지다. 전개 상에서 일찍이 죽은 봉식과 달리 봉식의 형 봉수는 전개상 3막에 해당하는 즈음에야 등장한다. 그는 ‘한’에게 무기를 쥐어주고 기다렸다가 준석을 제외한 모든 친구들이 죽은 이후 다시 등장해 지금껏 진행돼 온 네 친구의 추격전이 허무할 정도로 한을 빠르게 처리하고 극에서 빠진다. 엔딩크레딧에서도 ‘특별출연’으로 등장하긴 하지만, 그 역할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보여서는 안 됐을 일이다. 또한 뒤에 등장한 준석의 조력자 ‘빈대’의 대사를 통해 관객은 ‘한’이 죽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데 그렇다면 한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 걸까. ‘한’은 끝까지 죽지 않는 인물로 하나의 메타포로 보여진다. 살인 청부업자 ‘한’은 4명의 친구들이 도박장 털기에 성공해 기뻐하는 순간 그 직후에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아지트에서 한 인물의 귀를 제거하고, 곧이어 총으로 쏴서 죽인다. 한쪽에는 그가 죽인 걸로 예상되는 시체들이 쌓여있고, 그의 집에는 그 시체들의 것으로 예상되는 ‘귀’가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한’은 네 친구들이 도박장의 하드디스크를 털었다는 이유로 그들을 쫓을 것을 명령받는다. 이후 한은 중간에 경찰에 붙잡히기도 하지만 곧 윗선에서 막아 금세 풀려나며 준석을 제외한 세 친구들을 빠르게 처리하는 데 성공한다. 그의 실력이라면 준석 역시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겠지만, 영화 초반 준석에게 총을 넘겨준 봉식을 죽였다는 이유로 봉식의 형 봉수 패거리에게 쫓겨 여러 발의 총을 맞고, 바다로 떨어진다. 관객은 그럼에도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한’이 그냥 평범한 인간이 아닌, 준석이 거부하지 않고 맞서야만 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 ‘어떤 것’이 되겠구나를 예상하게 된다. 경찰 권력도 가볍게 이겨버리고, 죽음 같은 건 우습게 생각하는 것. 청춘을 몽땅 짓밟는 것. 의미심장하게 ‘귀’를 수집하는 것.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쉽게 예상되지 않는다. 그런 채로 준석은 한과 맞서 싸우기 위해 다시 한국으로 배를타고 귀국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감독은 과거 인터뷰에서 텍스트로 말하는 영화보다 텍스트상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영화적 화법으로 보여주는 시도를 하고 싶다고 말하며 ‘시네마틱’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가 말한 시네마틱은 무엇이었을까. 불친절한 영화에 대한 포장이었을까. 그러나 영화는 가족도, 메타포도 다 던져둔 채로 불친절을 넘어 해석이 도저히 불가능한 수준으로 귀결한다. 넷플릭스에서 풀린 지 이제 고작 2주, 혹평은 많지만 진지한 담론은 없어 아쉬웠다. 또한 감독의 코멘터리도 확인되지 않아 궁금증과 아쉬움이 넘쳐난 채로 나 역시 아쉽게 평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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