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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모 Jun 28. 2022

얼굴 그리기


나는 주로 듣는 사람의 입장에 서는 편이다. 가벼운 인사가 오간 다음에 보통 상대방이 던진 화두로 대화가 흘러간다. 그래도 사람을 대하는 직업을 경험했던 터라,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지만 먼저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과거에 질문 때문에 낭패를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릴 적 수많은 질문을 주고받으며 함께 커온 동네 형은 잘못된 질문과 대답 하나로 나와 관계가 멀어졌다. 또 자신만의 답을 정해놓고 질문을 던지던 선배는 내 대답을 듣기보다 자신의 답을 강요하기 바빴다. 사람은 오랜 시간 함께 할수록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자잘한 질문과 구구절절 설명으로 상대방의 화상을 그려가는 것보다 상대방에게서 느껴지는 태도와 눈빛을 통해 화상을 그려가는 재미가 더 크다. 그래서 나는 질문하는 것을 최대한 피한다. 오히려 더 자주 보고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다.

  

나에게 상대방의 화상을 그리는 일은 길고도 멀다. 4B연필로 캔버스를 스치며 테두리를 잡다가도 재미난 시간을 보내면 꾹 눌러서 흔적을 남긴다. 대학생 시절, 방황하며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할 때 나를 잡아준 선배의 화상에는 꾹 꾹 눌린 자국이 많다. 그 선배의 얼굴을 떠올리면 그 시절의 얼굴이 남아 있다. 반면 뒤에서 내 욕을 하고 다니던 대학 동기의 화상에는 구멍이 많다. 그리기 싫어 연필만 빙빙 돌리다가 구멍이 뚫려 버렸다. 그러다가도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면 지우개로 퍽퍽 지우지만 꾹 눌린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위에 새롭게 다시 그려도 흔적을 덮을 수 없어 남겨둔다.


흔적이 심한 캔버스를 고르라면 자화상과 가족들을 그린 캔버스다. 매년 새로 그려야 한다. 더 이상의 질문이 필요가 없지만, 나이가 들수록 스케치를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해가 되는 부분도 늘어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계속 생긴다. 꾹 눌린 흔적도 있고 너무 세게 눌러 구멍 난 곳도 군데군데 보인다. 좋았던 기억과 아팠던 기억들이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엮여 있기에 아름답다 할 순 없지만 애착이 크다.


이 캔버스들에 색을 치하는 날이 올까 생각한다. 연락이 닿는 한, 평생 데생에서 멈춰 있지 않을까. 더 이상 각자의 삶이 바빠서 연락이 뜸해지다 못해 연이 끊어진 캔버스들은 조금씩 색을 칠하고 있다. 한 편의 그림으로 내 맘속에 남아서 그림처럼 그들의 삶이 행복하기를, 화사하기를 빌 뿐이다.


<줄무늬 셔츠를 입고 있는 자화상> 1910년,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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