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7시, 따릉이를 타고 집을 나섰습니다. 평일 내내 복작거렸을 경복궁이 아직 늦잠에 빠져 있네요. 인적 드문 광화문 광장을 내 집 앞마당인 양 쌩쌩 달려, 녹음이 우거진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서울역으로 향합니다.
8시 30분에 한약방에 도착하니 벌써 선생님과 LYH선배님, JY까지 모여 출발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얼른 물 한잔하고 한숨 돌린 후 출발을 서두릅니다. 막히면 안 되잖아요? 어디 가냐고요? 지금 임실 좀 가려구요. 바로바로 임실에서 프로 농사꾼으로 '거의 유기농 작약'을 재배하고 있는,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태극학회의 자랑, 태극학회의 보물'KN선배님을 만나기 위해서지요.
다행히 차가 막히지 않습니다. 공주를 지날 무렵 창 밖으로 온통 산이 노릇노릇합니다. 창문 틈으로 비릿한 향이 바람에 실려 오는 게, 알밤 꽃이 핀 계절이네요. 앞자리에 앉아 계신 '한약의 두 거장'의 대화를 엿듣는 것만으로도 이미 보람찬 시간입니다. "선생님, 왜 약을 쓸 때 그 방약합편의 묘라는 게 있잖습니까?" "그렇취!" "허허" "허허허허" "허허허허허허...." 석가와 가섭의 '염화미소'가 난무하는 현장입니다.쥐뿔도 몰라도 왠지 연꽃을 들고 서성대기라도 해얄 것 같습니다.
밤꽃이 피는 계절입니다
LYH선배님이 부지런히 액셀을 밟은 덕분에 (실은 미쿡산 고급승용차 알아서 간다던가 어쩌던가) 정오 무렵 집결지 마이산 남부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JY샘 차도 도착하고, 대전에서 YK샘도 애저녁에 도착했고, 오늘의 주인공 KN선배님도 이미 와 있다니, 이제 이산가족 상봉 시간만 남았습니다.
신입생 시절 본초기원학회장이던 KN오빠를 따라 동기들과 함께 약초구경(은 뒷전이고 실은 뒤풀이가 더 재밌는) 한다고 지리산이며 이런저런 산을 누비고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밥 사줘, 술 사줘, 약초 보여줘, 뭐 이런 재밌는 혜자과가 다 있나 싶었더랬지요. 잃어버린 KN오라버님을 23년 만에 다시 만난다니 반가운 마음이 이미 넘실대네요.
한바탕 떠들썩하게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나눈 뒤 마이산 탑사를 향해 출발합니다. 근데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일단 출출한 배를 채워야 산행이든 뭐든 되잖겠습니까? 맛집은 KN오라버님이 이미 다 수소문을 해 놨네요. 역시는 역시. 산채비빔밥과 탁주로 몸과 영혼에 신선한 양분을 가득가득 채워 넣습니다. 일단 짠~
금강산도 식후경, 산채비빔밥과 탁주의 향연
마이산은 뜻 그대로 말[馬]의 귀[耳] 같은 모양으로 두 암봉이 나란히 솟은 산입니다. 담수호였던 곳이 7천만 년 전에 지각변동으로 융기되어 산이 되었다 합니다. 그래서 화강암이 아닌 모래와 진흙으로 이루어진 퇴적층에 자갈이 곳곳에 박혀있는 독특한 풍광을 자아냅니다.게다가 마이산은탑사가 유명합니다. 20세기 초 이갑룡 처사가 80여 개의 돌탑을 쌓았는데, 사이사이에 틈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면서도 틈새를 완전히 메우지 않아 바람이 통하도록 했다네요. 덕분에 태풍에도 끄떡없답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세월을 오래 견디려면 적당한 여유가 필요한 법이라는 걸 이렇게 또 한 번 배우고 갑니다.
마이산 탑사 앞에서도 '한약' 이야기는 그칠 줄 모릅니다
하... 그러고 보니 햇살이 너무 뜨겁습니다. 올해 들어 가장 더운 날씨라네요. 하산길에 아이스커피와아이스크림으로 더위를 식히고 갑니다. 좋은 사람들과는 이렇게 얼굴만 마주하고 있어도 즐거운 것 같습니다^^
나를 살린 아이스커피
자자,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번엔 KN오라버님이 종종 찾는다는 암자 '상이암'으로 향합니다.산중턱에다 차를 대 놓고 다시 산행을 시작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올해 들어 가장 더운 날씨... 섭씨 30도를 넘는 날씨.... 계속 오르막.... 하기야 좋은 곳은 좀 고생을 해서 가야 그 가치를 더 느끼는 법이라며 애써 이유를 찾아보지만 YH선배님의 말씀이 다시금 떠오르네요. "아니 암자 바로 아래 주차할 데가 이렇게 많은데 왜, 왜, 왜, 왜서, 우리는" ㅠㅠ 그건 바로 좀 있다 알게 될 KN오라버님의 큰 그림 때문이라는...
각종 음료 캐리를 담당한 셰르파=나
상이암(上耳庵)은 9세기에 창건된 절입니다. 고려 태조 왕건과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각각 등극하기 전 이곳에 와서 치성을 드리니 하늘에서, “앞으로 왕이 되리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여 상이암이 되었답니다. 여기서 왕이 세 명 나온다는 전설이 있다는데 그러고 보니 아직 '왕 TO'가 하나 남았네요. 혹시...?
시원한 약수를 한 사발씩 하고, 법당에 들러 삼배도 올리고, 고요한 경내를 이리저리 둘러봅니다.
법당에 고요히 앉았으니 모든 번뇌가 가라앉는 것 같습니다
하산길엔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성큼성큼 발을 딛습니다. 땀을 잔뜩 흘렸더니 어느새 배가 출출합니다.
저녁식사는 2시간을 푹 고아낸 녹두 오리탕입니다. 여기도 KN오라버님의 비기의 맛집입니다. 어찌나 담백하게 맛나는지 고기는 물론이고 국물까지 쉴 새 없이 위장으로 술술 들어갑니다. 장내 세균이 알아서 부르는 맛?! 게다가 KN오라버님의 사랑하는 그녀, 언니께서 준비해 준 수제 막걸리까지 더해지니 이보다 더한 보양식이 있겠습니까? 없어 없어~상이암을 오르내리며 위장을 깨끗이 비워 둔 덕분에 이 좋은 오리탕을 바닥까지 박박 긁어 감식(甘食)할 수 있었습니다. KN오라버님의 큰 그림 상타치?!
다시 먹고 싶은 그 맛, 담백한 녹두 오리 백숙입니다
정오에 임실에 도착해 저녁 7시가 될 무렵까지 무려 18,000보를 걸었습니다. 'KKN배 임실 걷기 대회'는 이렇게 건강까지 챙기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막을 내렸습니다. 모든 참가자에게는 KN오라버님이 협찬한 갓 재배한 임실산 유기농 방울토마토 5kg이 증정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선후배님들과 어울려 즐겁고 보람찬 시간이었습니다. 하지(夏至)가 머잖은 덕분에 서울로 길을 잡는 동안에도 아직 해가 환했더랬습니다.임실에서 보낸 시간은 마치 꽉꽉 눌러 담은 장독대의 장아찌처럼 꺼내도 꺼내도 자꾸만 나올 것 같은 추억을 잔뜩 쟁인 시간이었습니다. 모두들 귀가하는 얼굴이 어찌나 밝은지 아직 해가 중천인데도 벌써 보름달이 뜬 줄 알았습니다.이런 시간 덕분에 한동안 즐거운 마음으로 일상으로 돌아가 또 열심히 생활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약빨이 좀 떨어진다 싶으면?? 그럼 지체 없이 다시 임실행입니다. 다음에 내려오면 '(바닷장어 말고) 민물장어'를 구워 준다던가 어쩐다던가, 내가 어디다 녹음을 해 둔 것 같기도 하고...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