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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옳은 Apr 13. 2022

처음부터 소극적인 공무원이었던 건 아닌데요

적극행정 우수사례는 못 만들더라도

종종 “적극행정 우수사례”를 제출하라는 공문이 내려온다. 적극행정은 말 그대로 공무원이 적극적으로 일을 해서 국민의 삶에 보탬이 되는 행정을 말한다.


‘적극행정 우수사례’를 보면 나와는 완전 다른 세계의 공무원들 같다. 내가 아는 세계의 공무원들은 늘 소극행정 중이다. 나를 포함해서 다들 참 적극적으로 소극적이다.

소극행정을 하는 나 언제 찍혔담 (출처 unsplash)


겨우 3년 조금 넘게 일하면서 확실하게 배운 게 있다면 “남들이 하는대로 해야 덜 혼난다.”는 거다. 변화를 주고 싶으면 거쳐야 하는 검토와 보고 과정이 거의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주민센터에서 별 것 아닌 민원을 처리하는 일조차도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행정 소송 문턱까지 가기도 한다.


절제(?)와 인내(?)만이 미덕이 되어버리는 이 공직사회에서 나도 남들이 하는대로, 하는만큼만 하는 데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 우연히 “그거 완전 적극행정이잖아!”라는 말을 들었다.


코로나 재택치료반에 근무하면서 내가 맡은 업무 중 하나가 건강관리키트 배송 명단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매일 보건소에서 만든 명단 중 키트 대상자를 걸러내 배송 담당기관에 보내드리는 업무다. 하루에 많게는 400명 정도의 명단을 만들어야 했다.


명단을 보내고나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답장을 기다린다. 답장이 오지 않는 게 좋다. 명단에 틀리게 기재된 행정동이 많으면 답장이 오기 때문이다. 시중에 행정동 대량 검색 무료 사이트가 없어 수 백건의 주소를 도로명주소 사이트에서 하나하나 검색해야 했다. 너무 바쁠 때는 검토할 시간이 없어 원본이 틀리지 않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비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토테미즘적으로 일을 해야 하는건지 갑자기 열불이 났다. 행정동 대량 검색,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도로명 주소 사이트에 데이터가 올라와있길래 고객센터에 전화까지 해서 물어봐도 그런 서비스는 없다는 말 뿐이었다.


엑셀만 조금 다룰 줄 알면 될 것 같은데… 그런데 사무실에 엑셀을 그정도로 잘 하는 능력자가 없다. 그렇다면 SNS의 순기능을 활용해볼까… 인스타 스토리에 “문과를 도와줘!”라는 내용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다.


도움을 준 언니, 친구, 후배님들 모두 고맙고 사랑해요 (출처 내 인스타그램) 

이 정도는 아주 껌으로 다루는 대학원생 다니는 후배가 파이썬으로 해결책을 만들어 보내주었다. 도로명 주소만 있어도, 혹은 아파트 동 호수까지 있어도 행정동을 뚝딱 알려준다. 똑똑한 민간인이 열 공무원 살린다더니(?) 정말 맞는 말이다. (다시 한번 정말 고마워!)


문제를 이렇게 해결했다고 담당 팀장님께 지나가듯이 말씀드렸다. 그때 팀장님이 그 말을 하신거다. “그거 완전 적극행정 우수사례 아니냐!”고.


사실 충격 받았다. 치히로의 엄마 아빠가 돼지에서 인간으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고 해야 하나. 골치가 아프지 않으려고 타성에 젖는 방향에 머물러있기로 결심했다가 별안간 옛날 습관이 나와 지금의 모습을 들킨 느낌이었다. 한때는 나도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려고 밤을 새는 열정 가득한 대학생이었는데, 수많은 보고와 결재라인, 각종 조례와 규칙에 치여 “어쩔 수가 없네요.”라는 말이 더 익숙해졌다.


누가 또 내 사진을 몰래.. (출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인터넷 검색)


공무원들 하는 일이 유연성을 발휘할 수 없고 도출되는 결과는 0 아니면 1이라고 할지라도, 도출해내는 과정을 효율적으로 바꾸는 노력은 해볼 수 있다. 하위직 공무원이라 개선에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것도 맞지만 반대로 상위 기관의 공무원들은 일선에서 일해보지 않아 현장을 모르기 때문에 어디를 고쳐야 하는지는 내가 더 잘 알 수도 있다.


이렇게 고민하나 하지 않으나 받는 월급이 똑같고 오히려 개선의 목소리를 내는 순간 튀는 사람으로 찍혀 일을 더 많이 하게 되는 수가 있다. 그래서 다들 잠자코 있는 것이긴 한데… 돼지가 되었다가 사람이 되었다가 하는 기분도 썩 좋은 건 아니다. 일단은 사람이고 싶다. 아직 일한 지 얼마 안 돼서 힘이 남아 돈다는 말을 들을지언정 옛날을 추억하는 돼지로 남은 공직생활을 보내기엔 인생이 너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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