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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단비 Oct 12. 2020

연결되는 삶 (2)

삵과 고래기린과 사육사에게

서로의 다름은 관계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퀸치광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고 밴드 ‘퀸’에 빠진 이들을 일컫는 신조어였다. 그들은 퀸의 무엇에 열광했을까. 나는 그들 관계의 형태가 퀸의 음악과 그들의 팬을 만드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제각각 개성이 강함에도 누구 하나 지워지지 않는 관계.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 그런 관계의 기저에는 신뢰가 있었을 것이다. 신뢰란 어감이 주는 것만큼 따뜻하기만 한 단어는 아니다. 갈등과 고난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신뢰는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퀸의 인터뷰 중 이런 내용을 본 적 있다. 밴드가 잘 되면 결국 해체한다는 말들, 언제까지 퀸 일지 두고 보자는 말들 사이에서 그들은 어떤 오기가 있었던 것 같다고. 그래서 오래갈 수 있었던 것 같다고. 그들은 아마 그들 스스로의 오기를 믿었는지도 모른다. 


누구 하나 지워지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는 이론적으로는 간단한 일이다. 각자를 드러내면서 서로를 해치지 않으면 되니까.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나를 드러내면 누군가를 해치게 되거나 혹은 스스로가 지워진다고 여기 때문이다. 수업시간에 발표 혹은 질문을 할 때 눈치가 필요한 것, 불편함을 내비치면 프로 불편러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 진지충이라는 단어 등이 이를 반증한다. 발표를 하는 순간, 불편함을 내비치는 순간, 진지한 생각을 풀어내는 순간. 그 순간을 대립으로 받아들인다. 나와 타인 간의 대립, 타인과 우리와의 대립.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대립의 끝은 합의가 아니라 파멸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 생각 때문에 누군가의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의 긴장감을 부정적인 긴장으로 느끼게 된다.


나는 이를 한국사회의 큰 특징이자 문제점이라고 생각한다. 합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것이고 합의의 가치가 그만큼 낮은 것이며 그로 인해 개인의 특성은 더더욱 드러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계는 ‘나’라는 개인이 존재해야 성립된다. 얼핏 생각하기에 개인이 없으면 관계가 더 중요해질 것 같지만 개인이 없다면 관계도 곧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합의에 대한 신뢰 부족으로 개인이 사라진 사회는 관계의 의미를 잃고 서로 간의 단절을 초래한다. 개인의 파편화. 현대 사회를 ‘관계가 단절된 개인주의적 사회’라고 말하곤 하지만 정확하게는 ‘관계가 단절된 파편화 사회’라고 부르는 게 더 맞지 않을까.


합의에 대한 신뢰를 쌓으려면 합의에 대한 경험이 중요하다. 또 합의에 대한 경험에는 관계 유지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퀸이 해체하지 않으려는 오기로 서로 간에 어떻게든 합의를 만들어 낸 것처럼. 합의는 굉장히 번잡스럽고 시끄러운 과정이다. 한 번은 4차원 식구들끼리 대화를 하다가 크게 웃음이 터져버린 적이 있다. 대화가 이런 식이었기 때문이다.



연두 : 우주는 왜 생긴 걸까? 우주의 이유가 너무 궁금해!

삵 : 우주 앞에 우리는 한없이 작은 존재일 뿐이야.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제이크:신이 있다면 우주의 모습일까? 종교는 왜 있는 거지?

은비(이하 최주성이) : 그게 도대체 왜 궁금한데!     



이 말들이 카페 한 구석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질 수밖에. 중간에 ‘우리 지금 각자 다른 말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 전까지 아무도 우리가 그러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각자의 자기표현에 너무나도 열중하고 있었던 나머지 서로가 다 다른 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이야기만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건, 그럼에도 그건 싸움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린 서로의 말을 다 듣긴 듣되 자기 말만 하는 이상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우리끼리도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거지만 분명 그건 대화였다. 서로를 인지하고 눈빛으로는 뭔가 서로 반응하고 있었기 때문에. 존중. 최소한의 존중이란 그런 게 아닐까.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


합의의 가장 밑바닥에는 존중이 있다. 개인에 대한 존중. 결국 또다시 개인으로 돌아온다. 개인, 합의, 존중. 흔하디 흔한 단어들 속에 많은 문제들의 해결책이 숨어있다. 나는 차별에 대한 문제도 개인의 존중으로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개인이 아니라 성별로 보는 것, 성적 지향으로 보는 것, 직업으로 보는 것, 인종으로 보는 것. 전부 무너지고 파편화된 개인과 그로 인한 불안에서 오는 것들이다. 여성이 아니라 한 사람이다. 이성애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이고 황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이다. 서로를 친구로, 전 애인으로, 동생으로, 언니로 보지 않고 서로를 그저 한 사람으로 봐주는 관계, 4차원 식구들을 만난 건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4차원 세계가 좀 더 넓어졌으면 좋겠다. 우린 모두 한 명의 사람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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