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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트라슈 Apr 22. 2020

이별 후에 써내려가는 분노 일기

비 우산 광화문, 왜 항상 나한테 양해를 구하지?



우산을 샀다.


우산을 잊어버리고 또 사는 것은 일상이지만 그날을 기억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갑작스러운 폭우가 내리던 날이었다. 나에겐 비닐우산이 하나 있었지만 둘이 같이 쓰기엔 작고 비좁았다.

우리는 한쪽씩 어깨가 젖어들도록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겨우 편의점에서 하나 남은 우산을 발견했다.


아주 크고 무거운 검은색 장우산이었고 만 오 천원이 훌쩍 넘는 가격에 주저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각자의 우산이 생기기 전까지 우리는 좁은 비닐우산을 함께 쓰고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입춘이 지났지만 바람은 찼고 비까지 더해져 한기가 느껴졌다.


종로 3가를 지나 광화문, 안국에 가는 내내 우리는 각자의 우산을 쓰고도 손을 잡고 있었다. 몇 번이나 손을 빼려다가 나는 눈치만 보다가 그만 두었다



손은 시렸고 맞잡은 손이 비에 젖어서 추웠지만 그 상태로 이십 여분을 걸었다.



먼저 놓자고 말하지도, 주머니에 손을 넣지도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각자의 우산을 쓰고도 꽤 오랜 시간 손을 맞잡고 비를 맞았다.

그 상태로 광화문 우체국, 청진 상가, 교보문고를 지났다.


는 손이 얼었다는 핑계로, 옷이 젖었다는 이유로 차를 한잔 더 마자고 했다


따뜻한 유자차에 손을 녹였고 컵을 잡은 내 두 손을 상대가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다.  

                                                                                                                    <우리도 사랑일까>


그를 만나면서 화가 나는 순간들은 많았다.


분노와 서운함이 뒤섞이는 순간이 빈번하게 찾아왔다.

근교에 나갔다가 집에 일이 생겼다고 내게 양해를 구한다거나 , 영화를 예매한 날 갑작스러운 친적의 방문에 당혹감을 드러내기도 했고,  측근의 건강 상의 문제, 회사 일 등등을 이유로 그는 나에게 사과했다.  



양해를 구하고, 이해를 부탁했지만


반복되는 이벤트에 나는 포기했고

다음을 기약하는 상대의 태도가 나를 서운하게 했다.



상대가 양해를 구하고 이해를 요청하는 건 측근이 아닌,

항상 내쪽을 향해있었다.  

왜 그 방향은 한번도 달라지지 않는지, 이에 대한 서운함이  차곡차곡 쌓였다.



때때로, 아니 사실은 종종 서러워서 나는 상대를 우선순위에서 지울 생각을 하고  서운하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다.


매번 이유가 있었고, 다급한 그의 목소리에 마음 약해져서, 화를 내지 못했다.  서운하다고 말하지 못했다.  


풀이 죽고 지친 상대의 목소리에 나는 말을 삼켰다.



이 관계가 끝나기 전에,

그러니까 내가 포기하기 전에 말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그 순간마다 비 오던 날 손잡고 걷던 광화문 일대를 떠올리면

더욱 솔직해지기가 어려웠다


이해하려고 마음먹으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었고,


때마다 합당한 이유를 들었기 때문에 명분은 충분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고,

괜찮은 감정은 일시적일 뿐이었으며,

그 마저도 불편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지 못하는 나의 기질에서 비롯된 일종의 도피였다.   


(유사한 방식으로 반복되는) 문제의 기원이 동일하다는 것을 상대는 인지하지 못했다.


나는 그것을 설명해야 했을까.


말하고 또 말해서 이해시켜야 했을까. 그렇다면 달라졌을까.

한번쯤 시도를 해봐야 했을까.

그렇다며 나는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참아야 했을까.

상대가 나를 이해시키지 못한 부분까지 내가 헤아려야 했을까.

결국 이 관계에서 솔직했던 건 내가 맞을까.

미련이 남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일까.  



매번 그렇다.

상대와 관계는 끝인데 감정은 남아서 사람을 괴롭힌다.


몇 번을 반복해도 내성은 생기지 않고, 되려 각성만 된다.  


그런데 나는 왜 이걸 계속 반복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생각 끝에 하나씩 비워내기 시작했다.



1. 이별을 겪고 나서 제일 먼저 슬펐던 것들을 지운다

2. 그다음은 분노를 비운다

3. 그리고 남은 좋았던 것들, 상대로 인해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린다.


그 결과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장면은 비 오는 날 손잡고 걸었던 광화문과 종로 일대의 풍경이었다.


그 날의 온도, 봄이지만 차가웠던 바람, 비에 젖어서 더욱 짙어진 경복궁 돌담길 따위. 길 끝에서 찾아 들어갔던 한옥 카페의 비에 젖은 나무, 흙 냄새 같은 것들.   




나는 그 긴 시간 동안 행복했던 순간이 고작 이 한 장면이라는 사실에 더없이 서글퍼졌다.


결국 다시 2번(분노)으로 돌아갔다...


염병, 화만 남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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