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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나모 Feb 07. 2021

여성 플랜트 엔지니어로 살아가기

회사에 입사해서 하이바와 하네스 손에 받은 날이 기억난다.


어쩐지 착용했다기보단 머리에 얹어있는 듯한 하이바는 아무리 사이즈를 조절해봐도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지만 그 어색한 나도 나름 괜찮았다. 하네스를 어깨에 지고 안전화를 신고 저벅저벅 현장으로 걸어 나갈수록 뭔가 내 안에 있는 센 언니의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내가 바로 현장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다!


10분쯤 지났을까? 이상하게도 현장을 걸으면 걸을수록 내 안의 센 언니는 자꾸 작아져만 갔다. 평생 여성스러움과 거리가 있게 자라온 나였지만, 현장에서 기름때를 묻히고 일하는 공사판의 남자들을 관리해야 하는 입장이 되자 찾을 수 없었던 내 안의 여성스러움이 샘솟았다. 한국 남자들보다 훨씬 크고 우락부락한 외국인들 사이에서 평균 이상의 내 덩치가 스스로 아담하게 느껴지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과거보다 플랜트 업계에서 일하는 여성이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현장에서의 나는 여전히 보기 힘든 작은 동양 여자 엔지니어였다. 현장에서 일하는 스텝들도 저 사람이 여긴 웬일이지? 라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심하게는 휘파람을 불며 나의 관심을 끌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안 되지만 저런 저급한 관심은 아직 플랜트 업계에서 일하는 여자로서 스스로 감당하고 처리해야 될 사항이었다. 모국에서도 아직 해결 못 한 성차별을 해외에서 매번 반응하고 바로잡기는 쉽지 않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현장에 오기 전에 저런 문제는 무던하게 넘길 짬바가 된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기름때를 한껏 묻히고 내 몸보다 거대한 밸브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저 사람들 사이에서 하네스와 하이바조차 완벽하게 소화하지 못하는 나는 스스로 점점 소심해졌다.


현장에서 복귀하고 사무실에서의 일은 할 만하다고 느꼈다. 남자들이 아무리 많아도 사무실 안에선 내가 특별히 여자라고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플랜트 업계에 있는 한 현장을 피할 수는 없고 현장을 생각하면 작아지는 자신감이 스스로도 정말 이상했다. 현장 파견이 싫은 것도 있었지만, 극남초 현장에서 과연 여자 엔지니어로, 그리고 현장의 관리자로서 스태프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냐? 라는 질문에 확답할 수 없었다.


호주에 오고 나니 고민이 커졌다. 현장직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호주에서는 엔지니어 직군 대부분이 현장에서 일을 한다. 출퇴근 시간이면 현장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는 이곳에서 과연 내가 여자 엔지니어로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하루하루 고민이다. 탈 건설을 꿈꾸는 모든 건설업계의 사람들과 같이 언제든 이 업계를 떠나고 싶지만, 어쩌다 보니 한해 한해 쌓인 경력이 그래도 이 업계를 떠나지 못하게 옭아매는 느낌이다. 여자라는 조건을 내세워 나 스스로 성차별적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냐며 스스로 자책하다가도, 현장 일이 너무 고되었다며 너는 이런 일 안 했으면 좋겠다는 짝꿍을 말을 들으면 여자라서 어쩔 수 없는 신체적, 체력적 부족함은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며 위로하기도 한다.


입사 초 현장에서 일하는 프랑스 여자 엔지니어를 만난 적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도 그 분위기가 남다른 엔지니어였는데, 현장 일을 마무리하고 현장 사무실로 돌아온 그녀는 땀에 찌든 얼굴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몸매가 한껏 드러나는 민소매를 입고 그녀만의 휴식 시간을 갖는 모습은 현장과 완벽하게 어울리다 못해 너무 멋있었다. 분명 온몸으로 여자임을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냥 현장의 엔지니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미래의 나를 꿈꿨었다. 지금 어울리지 않는 이 하이바도 언젠가 나에게 찰떡같이 어울리겠지. 나도 몇 년 지나면 저런 멋있는 분위기의 엔지니어가 되겠지.


7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현장이 어색하다. 엔지니어 앞에 여성이라는 단어를 붙여가며 스스로 한계를 두고 있다는 느낌은 닦지 않은 이처럼 영 찝찝하다.


얼마 전 지인의 회사에 신입 현장 오퍼레이터를 채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퍼레이터는 엔지니어보다 훨씬 더 현장을 베이스로 일하는 사람들인데, 그중 여성 오퍼레이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극도 받고 반성도 했었다. 그래 역시 플랜트 업계에는 내 생각보다 멋있는 여성들이 많구나! 오늘 들은 소식으로 그 오퍼레이터는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생각이 많아지는 소식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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