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지 Jun 18. 2018

마음의 방

제주일기

[제주일기]

2017. 08. 13. 

12. 마음의 방 



  바다를 바라보며 저녁식사를 할 수 있어야 함. 공항과 가까워서 아침 비행기를 타러 가기 쉬운 위치. 삼양 검은모래 해변에 마지막 날 숙소를 잡은 이유였다. 저녁 7시에 도착해 해가 지기 전의 해수욕장을 짧게 구경했다. 검은 모래 때문에 바다 색이 예쁘지는 않지만 그 어느 모래사장보다 결이 고아서 부드러웠다. 검은 모래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모습이 흑진주를 연상시켰다. 모래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클레이 아트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주의 여타 에메랄드 빛 바다와는 색다른 매력이 있는 해변이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가게에서 식사와 술 한 잔을 하고 있자니 여행의 피로가 몰려와 동생과 나 둘 다 말수가 적어졌다. 제주에서의 마지막 밤이라는 아쉬움이나 바닷가라는 흥분 없이 나른한 침묵 속에 식사를 했다. 별다른 반응이 없는 동생을 보니 재미없으면 어쩌나 내심 걱정됐다. 그럼에도 머릿속에 많은 생각들이 떠다녀 즐겁게 대화할 만한 주제를 꺼내기가 힘들었다. 생각을 마음껏 정리할 수 있게 얼른 혼자가 됐으면 했다.



  본래 원룸 2인실이었을 작은 방에 게스트하우스로 꾸미기 위해 무리를 해서 들여놓은 2층 침대 2개가 꽉 차 있었다. 쾌쾌한 곰팡이 냄새와 어둑한 실내 분위기가 별로 묵고 싶지 않은 마음을 부채질 했다. 그러나 이미 결제를 해버렸고 다른 숙소들은 방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짐을 풀고 잠을 청했다. 세상에 혼자 남은 기분. 옆 침대에 등을 돌리고 누워있는 동생도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으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 들었다. 이런 환경에 처하게 하다니 미안했다.


  역시나 꿈으로 형상화 됐다. 끈끈한 감정으로 엮여있는 두 친구와 버스를 타고 어디를 가는 중이었다. 날씨가 잔뜩 흐려 간간히 빗방울이 창문을 때렸다. 내가 애정을 주는 쪽인 친구에게는 심정변화를 전부 말해주었지만 애정을 받는 쪽인 친구에게는 말하지 않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서. 불편한 감정을 안고 버스는 어디론가 향하는 중이었다. 친구가 나에게 취조하듯 집요하게 물었다. 

  “너 왜 제주에 간거야?”

  “몰라도 돼.” 

  참담했지만 한편으로는 좋았다. 감정을 미끼로 타인을 전전긍긍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사랑받고 있다. 한심하면서도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다른 친구의 표정이 더욱 편안함을 주었다. 제주도에 오게 만든 핵심 감정에 가까이 갈수록 씁쓸한 행복을 느꼈다.


  몇 차례 실갱이 끝에 말을 해주자는 결심이 섰다. 이걸 말해주면 너는 얼마나 실망하고 괴로워할까. 나를 사랑해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배신감을 느꼈으면 좋겠다. 무심하게 말했다. 


  “살기 싫어서.”



  새벽 6시, 곰팡이 냄새가 나는 꿉꿉한 침대.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오랜만에 날 것으로 드러난 감정. 살기 싫다. 여전히 나는. 살기가 싫다. 그렇지만 이곳은 너무 불쾌하다. 얼른 이곳을 떠나고 싶다. 아직 벗어날 수 없다. 해가 뜨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뉘여야 한다. 동생까지 이런 곳에 끌어들이다니. 좋은 것만 누리게 해 주고 싶은 존재를 나쁜 곳으로 데려왔다는 죄책감과 부끄러움. 만약 나 혼자였다면 어땠을까. 견딜 수 있었을까. 장담할 수 없었다. 시간은 서서히 흐르고 밤은 지나간다. 아침이 오면 이곳을 떠날 것이다. 



2017. 08. 13. 끝. 

작가의 이전글 동생과 4박5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