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셨나요?"
퍼포먼스 마케터로서 IT 업계 동료들을 만나면 가장 흔히 들을 수 있는 질문이다. 나는 대답을 하기 전 찰나의 순간에 진지하게 내 직업선택 가치관을 쏟아낼지, 대충 에둘러 말할지 고민하곤 한다. 속 깊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자주 없기에 대부분의 상황에서 나는 "그냥 숫자 보는 게 좋아서요"와 같은 무책임하고도 지루한 답변을 내놓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관련해서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다. 내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어떻게 이 직업을 찾고 입문하게 되었는지 이 자리를 통해 다 풀어놓아 보려고 한다. 현재 같은 일을 하고 있는, 혹은 직업 선택을 앞두고 있는 누군가에게 이 글이 작은 위안이 되길 바란다.
1. 그때의 상황
때는 2015년도 2학기가 한창이던 10월 즈음이다. 나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아주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대학교에 들어오자마자 학업적 성취와는 크게 멀어진 터라 CPA, 세무사와 같은 시험류는 벽이 높아 보였고, 여느 친구들처럼 은행권/대기업 취업을 준비했었다. 지금은 더더 바늘구멍이지만, 그때도 대기업 취업의 벽은 높았기에 2학기가 끝나갈 때까지 나는 원하던 곳에 취업을 성공하지 못하였다. 나보다 먼저 취업하거나 시험에 합격한 친구, 선후배들을 보며 좌절의 시간이 길어졌다.
학기가 끝나고 운 좋게 한 곳에서 인턴으로 일 할 기회를 얻었는데, 그때 함께 일했던 회사가 한국의 대표적인 IT 기업이었다. 이 IT 회사의 삶은 취업을 준비하며 선배들에게 들었던 수많은 회사생활 썰(?)과 너무나도 달랐다. 미팅 차 방문했던 그 회사의 건물에는 실리콘밸리에만 있는 줄 알았던 빈백, 간이침대, 마사지 기계, 게임기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부장님, 과장님 같은 호칭도 없었으며 트레이닝 복에 모자를 쓰고 일을 했다. 출퇴근은 너무 자유로워서 정해진 일과 시간만 지키면 된다고 했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저런 곳에서 일하기로.
2. 내가 가진 것
어디에서 일할지 정했다. 이제 어떤 일을 하면 될지 고민할 차례였다. 그 기업의 채용 공고문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모르는 단어들 투성이었다. 기획이니 개발이니 내가 평생을 공부하며 얻지 못한 지식들을 필요로 하는 일들만 가득했다. 만만해 보이는(?) 채용공고 예컨대 경영지원, 인사, 마케팅 등의 익숙한 이름들은 대부분 5년 이상의 경력을 요했다. 나는 또 한 번 좌절했고, 그때 문득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장기 백수가 되는 건가..."
정신을 차리고 차분히 내가 가진 역량을 정리해 보았다. 나는 문송한 인간이었으나 수학을 좋아했고, 운 좋게도 영어 회화가 가능했다. 컴퓨터 게임을 좋아한 탓에 어려서부터 컴퓨터와 친했으며 엑셀을 곧잘 다루었다. 대학에선 경제학을 전공했기에 통계와 관련된 지식이 있었고, 맛보기로 들었던 경영학 수업 중에선 마케팅 영역이 가장 흥미로웠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퍼포먼스 마케터 관련된 핵심 역량을 살펴보니 딱 이거다 싶었다. '데이터 분석', '온라인 마케팅 채널 관리 및 집행' 그때 당시에는 제대로 된 뜻도 몰랐지만 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 같았고 하고 싶은 것 같은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다.
3. 입문
하지만 꿈꾸던 회사에서는 5년 이상의 경력을 요했다. 실망감을 뒤로하고 당시 IT 업계 채용의 바이블이었던 몇몇 사이트의 채용공고를 정독했다. 이름 모를 회사들이 '퍼포먼스 마케터'를 찾고 있었다. 내가 지원할 자격요건이 충족되는 회사는 어차피 이름값이 없는 회사였으므로, 당시의 나는 '회사에서 맥주를 마실 수 있는가?', '회사에 게임기가 놓여 있을 만큼 자유로운가?', '회사가 서울 한복판에 있는가?', '외국인과 일하거나 해외 출장을 갈만한 일인가?'와 같은 원초적인 기준으로 지원할 회사를 골랐다. 사실 이름값을 따질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마냥 좋아 보였던 삼성, 현대 같은 대기업은 졸업하며 멀어졌고 거대 IT 기업에는 자격미달이었다. 여러 곳의 면접 끝에 퍼포먼스 마케팅을 전문으로 하는 광고대행사를 골라 취업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2016년 7월에 이 직무에 발을 들여놓았다.
돌이켜 보면 몇 번의 우연이 겹쳤다. 대기업 취업의 문턱에서 몇 번의 실패를 했으며, 우연히 얻게 된 인턴 자리에서 국내 최고 IT 회사와 일 할 수 있었다. 우연히 퍼포먼스 마케터라는 직무를 알았으며 필요한 역량을 빠르게 키울 수 있는 곳에서 남들보다 먼저 커리어를 시작했다. 백수생활이 길어질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내가 일하고 싶은 환경에 나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직무를 선택한 것이다.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그때의 선택은 최선이었다.
현재는 두 번의 이직을 거쳐 당시 꿈꿨던 회사는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회사에서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 남들과 비교하면 끝도 없겠지만 소박하게 꿈꾸던 삶을 조금씩 그려 나가고 있다. 그때는 갖추지 못했던 역량도 많이 갖추었으며, 이제는 누군가에게 내 지식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고, 누군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 영역의 제일 앞에 서서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앞으로의 글을 통해 누군가는 도움을 얻었으면 좋겠고, 나 또한 많이 배울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