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 없는 회사에서 살아남기
2022년 4월, 한 번도 고려해본 적 없던 스타트업 S사에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는 가장 즐겁게 일했고, 가장 고되었고, 가장 많이 성장했으며, 동시에 가장 많이 아쉬움이 남는 커리어가 되었다.
그 이야기를 몇 회에 걸쳐 정리해보고자 한다.
I사를 떠나는 건 나에게도 큰 이벤트였다.
안정된 조직을 뒤로하고 불확실한 스타트업으로 간다는 건 내게도 큰 도전이었지만, 가족들에게는 걱정이 클 수밖에 없었고, 그런 가족들을 설득하는 시간도 필요했다.
11년간 함께 해온 동료들과의 이별 역시 아쉬움이 컸기에, 감사하게도 많은 만류와 다른 기회 제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남아 있는 것이 가장 안정적인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ㅎㅎ)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젊었고, 도전과 성장을 갈망하던 40세의 나는 이미 회사에 퇴직을 통보한 상태였기에 되돌리기도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렇게 이별의 시간은 수차례의 환송회로 이어졌고, 2022년 4월 22일, 쉬지 않고 곧바로 새로운 회사 S사에 합류하게 되었다.
S사는 자율주행 솔루션을 개발하는 회사로, 그중에서도 '인지' 기술 영역에서 국내외 여러 완성차 및 1차 벤더들과 거래하고 있는 유망한 스타트업이었다.
수차례의 시리즈 투자를 통해 자금도 풍부했고, 직원 수는 이미 300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내게 주어진 미션은, 스케일업 단계에 진입한 구매 조직의 안정화와 체계화였다.
입사 시점엔 각 부서에 나와 비슷한 경력을 가진 이들이 대거 입사하고 있었고, 회사는 그들에게 각자의 분야에서의 "안정화된 리더십"을 기대하고 있었다.
입사 초기에는 조직이 아직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매번 달라지는 방식과 불완전한 기록 관리로 혼란스러웠지만, 이전 회사에서 이미 체계화된 프로세스와 구조를 11년간 다뤄왔기에 이러한 문제를 빠르게 정비해가는 과정 자체가 오히려 기회처럼 느껴졌다.
절차를 만들고, 시스템을 정비하며, 각 부서를 돌며 변경된 프로세스를 교육하고 나아가 전사 공지하고,
구매 데이터를 분석하고 전략을 수립하며 초기 5개월은 정신없이 바빴지만 조직을 안정화하고 확실한 성과를 만들어낸 시기였다.
그러나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아무리 외형이 커지고 사람이 많아졌다고 해도, 이곳은 여전히 스타트업이라는 사실이었다.
첫 번째: 갑작스러운 경영관리 업무의 파도
스타트업이 성장하면서 모든 조직은 이전보다 빠르고 크게 업무를 달성하기를 기대 받는데 예를 들면 R&D는 더 기술을 완성도 있고 빠르게, Sales는 더 많은 고객과 계약을 해내기를 기대받는다.
그러나 이전에 없던 일들도 생겨나는데 그것에 대한 변화와 조정은 경영관리(Management Control) 부서가 중심이 된다. 즉, 새로운 업무나 이슈가 발생하면 우선 경영관리부서가 책임지고 정리해야 하고, 내부적으로 감당이 안 될 경우에만 외부 인력이나 조직을 신설하게 된다.
구매팀 역시 경영관리의 일부였고 나 역시 위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회사 내부 비위 건으로 인해 CEO 지시 아래 감사와 조사 업무를 병행하게 되었다. 다행히 이전 회사에서 감사팀과 수차례 협업을 해왔던 경험이 있었던 덕에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지만, 이처럼 예상치 못한 일이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 스타트업의 현실이라는 걸 실감하게 된 사건이었다.
두 번째: 조정되지 않은 고정비의 확산
또 다른 문제는 조직이 커지면서 생기는 관리 부재였다.
많은 신규 입사자들이 아직 회사에 적응하지 못했고, 초기 멤버들은 2-3명이 모든일을 하던 시절을 지나 수백명 규모의 회사에 다니고 있었기에 Top에서 Bottom에 이르기까지 체계화된 구조에서 업무를 해본 경험이 부족했다.
그 결과, 절차 없이 추진된 프로젝트들이 누적되고 있었고,계속해서 누적되는 고정 운영비와 인건비는 회사의 리스크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를 통제해야 할 C-Level들 역시 대부분 신규 입사자거나 아직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특히 나의 직속 상사였던 CFO는 Runway(현금 보유 기간)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회사는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관리되지 않은 리스크는 현실이 된다
대기업이라면 매출과 이익을 기반으로 Capex를 분석하고 투자를 결정하지만,(From 이익이여금)
스타트업은 미래의 투자 유치와 성장 가능성을 근거로 지출을 정당화해야 한다. (From 자본잉여금)
즉, 불확실한 미래의 기대값으로 현재의 지출을 통제해야 하는 구조다. 게다가 2022년은 외부 투자 유치가 용이한 시기였고,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큰 투자에 관대한 분위기였다.
돈을 써서 무언가를 해보고 싶은 부서입장에서는 CFO가 있으니 이를 관리통제하겠거니 생각하고, CFO입장에서는 새롭게 합류했다보니 이를 통제했다가는 기업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성에서 승인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게다가 스타트업 특성상 초기 개국공신들이 있는데, 이들은 CFO를 바이패스하고 CEO에게 승인을 받은다음 CEO가 이를 CFO에게 전달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이는 CEO의 지시로 여겨질 수 밖에 없고, 결국 관리의 부재로 이어진다.
결국 맡은바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책임을 임원이라면 질 수 밖에 없는데, Runway관리 실패로 회사는 자금난을 예상보다 빠르게 맞이하게 되었고, CFO는 회사를 떠나야 했으며으며, 이 일은 내 커리어에도 커다란 전환점을 만들게 되는 연쇄적 사건의 시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