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나 Aug 11. 2019

David Foster Wallace <이것은 물이다>

독서노트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지상철 안에서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의 케니언 대학교 졸업식 연설을 엮은 책 <이것은 물이다>를 다시 읽었다. 나는 두 철학자 휴버트 드레이퍼스와 숀 도런스 켈리가 공동 작업한 <모든 것은 빛난다>라는 책에서 월러스를 알게 되었다. 많은 한국 독자들이 나와 비슷한 경로로 그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월러스가 쓴 책은 <이것은 물이다>와 산문집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단 두 권만 한국에 번역되어 소개됐을 뿐이고 (더군다나 산문집은 <모든 것은 빛난다> 출판 이후에 나온 책이다) 그의 글쓰기 스타일이 워낙 난해하고 방대한 편이라 번역이 쉽지 않는다는 것도 작지 않은 이유였을 것이다. <모든 것은 빛난다>가 출판 당시부터 '잘 쓰인 인문교양서'라는 큰 호평을 얻었고 실제로 많은 독자가 이 책을 읽었기에 당연히도 이 비극적인 천재의 삶과 작품에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런 근사한 책을 쓴 두 철학자가 그의 작품을 수없이 인용하고 그의 삶과 가치관을 분석하고(그것이 동의든-비동의 든 간에) 하나의 본보기로 독자에게 보여주기를 원하냐는 순수한 궁금증 말이다.


<이것은 물이다-의미 깊은 날에 전하는 자비로운 삶에 대한 단상들 This is Water: Some Thoughts, Delivered on a Significant Occasion, about Living a Compassionate Life>


      어떤 독자가 이 강연을 듣기 전에 월리스는 평생 심각한 수준의 우울증을 겪었으며 46세에 결국 목을 매 자살을 했다는 사실을 먼저 듣는다면, 그가 이 연설을 썼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강연에서 그가 주장하는 것은 삶의 우울과 권태에서 빠져나오는 방법, 인간의 한계의 거론이 아닌 내면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숭고하고 감사한 무엇으로 변화시키는 주체적 태도-니체 식의 '자기 의지'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월리스의 목표로 삼았던 극단적인 자유와 의지는 너무나 완전한 나머지 타는 듯한 고통조차 절대적인 즐거움으로 바꿔서 경험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런 무한한 자유의 맥락에서는 그 어떤 다양한 경험도 동일한 선상의 의미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중요한 질문은, 이러한 경지가 인간에게 사실상 불가능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우리의 인간됨 자체가 세계와 자신에 대한 경험 방식을 제한한다면? 저자들은 모비딕 작가 멜빌을 거론하면서 멜빌이 말하듯, 이러한 인내심은 잠시 동안만 가능할 뿐이고, 결국에는 자살만이 유일한 선택일 거라 비판한다.


"아마도 월러스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슬픈 부분은 그가 열망했던 인간성, 그가 존경하고 탐했던 정신의 역량이 신기루라는 점일 것이다. 우리 문화를 구원할 가능성은커녕 월러스조차 스스로 도달할 힘이 없다고 자책했던 실존의 전 면모는, 사실상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다. 월러스가 그것에 도달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나약해서가 아니라, 그의 영혼 속에 깊고 끈질긴 인간적 한계가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빛난다, 82p


      두 저자가 인간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한 월러스의 이상은 '디폴트 세팅'을 의식하고 넘어서기이다. <디폴트 세팅Default setting>이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우리 머릿속 전자판에 영구히 박혀 있는 장치, 즉 내가 직접 겪은 체험들은 나 자신이 이 우주의 확고한 중심이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진실하고 가장 눈에 띄며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는 심오한 신념이다. 예컨대 일상의 사소한 순간에서 손쉽게 자기중심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자각하는 게 아니라 내 눈앞에서 길을 걷고 있는 낯선 타인도 동일한 내면세계를 가진 인물이며, 어쩌면 상상할 수도 없는 사건에 휘말려 고통받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해보는 일종의 '다른 방식의 사고(를 선택하기)'이다. 월러스는 인문학이 강조하는 이른바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 그것은 실제로 주의를 기울여 사물을 관찰하는 법을 진실로 배우고 그것으로 생각의 선택의 여지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두 저자의 말대로 그것은 삶의 전체적 이상향이 되기에는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사건 자체의 본질을 간과할 수 있으며 하루 24시간 타인에게 일종의 상상력을 덧씌우고 자아 바깥에서 사고하는 게 상당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멜빌이 말했듯 그것은 인간 본성과 맞지 않다. 월러스는 한평생 고통스러운 우울증에 시달렸으면서도, 숭고하고 이상적인 가치에 매달렸으며 덕분에 자신에게 요구하는 수준도 높아져만 갔다.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이 강화될수록 그는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더 나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월러스가 추구하는 이상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중심적 사고의 탈피는 인간으로서 훌륭한 내면을 가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책에서 월리스를 단테의 세계와 비교했듯 신성함이 개인의 외부에서 주어진다는 전통적인 관념과 완전히 결별하고 자신의 의지만으로 황홀하고 비현실적인 행복을 추구한다는 건 굉장히 희소성 있는 (처참한 실패로 끝나더라도) '의식적인 결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에 앞서 '어떤 것이 자연스럽고, 어떤 것인 부자연스러운가' 생각해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이 척도는 단순히 개인적 편안과 불편으로 나뉘는 것은 아니라 타인과 나, 사회, 도덕, 정의, 인간 본성, 종교 등 객관적인 가치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균형점을 찾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자유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승리하고 성취하고 과시하는 행위가 주류를 이루는 위대한 바깥세상에서는 별로 언급되지 않는 자유야말로 가장 귀중한 자유입니다. 진실로 중요한 자유는 집중하고 자각하고 있는 상태, 자제심과 노력, 그리고 타인에 대하여 진심으로 걱정하고 그들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능력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매일매일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사소하고 하찮은 대단치 않은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생각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남는 것이라고는 무의식의 상태, 디폴트 세팅, 그리고 극심한 '생존경쟁'밖에 없습니다ㅡ전에는 자기 것이었던 무한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끊이지 않는 고통밖에 남지 않는 것이지요. .... 내 이야기는 도덕이나 종교 혹은 어떤 교리에 대한 것도 아니며, 내세에 관한 심오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진실은 죽기 전의 삶, 현세에 관한 것입니다. 서른 살까지, 혹은 쉰 살에 이를 때까지도 자기 머리를 총으로 쏘아버리고 싶어 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 진실입니다. 진정한 교육의 진가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내 뜻입니다. 성적이라든가 학위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다만 깨어 있는 의식에 관한 것입니다ㅡ너무나 당연한 현실이고 근본적인, 우리 주위 환히 보이는 곳에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잘 보이지 않는 숨어 있는 현실, 매일 끊임없이 그 존재를 스스로 깨우쳐주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하는 그런 현실, 그런 현실을 알고 살아가는 각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물입니다."

ㅡ이것은 물이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작가의 이전글 조해진 <단순한 진심>, 진심이라는 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