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근로자의 날, 주말 내내 맑고 따뜻했던 날씨와 달리 서귀포 해안가 마을은 해무가 가득하다. 짙은 해무는 해까지 가려버렸고 때문에 꽤 스산한 날씨가 되었다. 4월부터 벼르던 가파도를 가기로 했다. 흐린 날씨에 잠시 망설여졌지만 이런 날도 좋을 거란 위로와 기대를 안고 배를 탔다.
청보리 사이에서 가파도를 가로질러 섬의 반대편 끝으로 갔다가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길은 섬의 해안가를 따라 둘러 걷고 난 후 마지막 배를 타고 나왔다. 휴대폰을 체크해보니 만보를 넘게 걸었다. 제주에 살면 매일 올레를 걷고 자연과 함께 걸을 줄 알았는데, 평일에는 서울보다 걷는 양이 확연히 적다. 서울에서 대중교통을 타는 것이 얼마나 많은 운동이 되는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걸어서 출퇴근을 하고, 점심시간에 올레길 산책을 해야 간신히 5-6 천보를 걷게 된다.
평소보다 많이 걸어서인지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한다. 쌀쌀한 날씨에 따뜻한 국물요리가 생각난다.
또똣하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메뉴를 찾던 중 말로만 들었던 '서광춘희' 성게 라면이 떠오른다. 모슬포항에서도 멀지 않은 거리라 바로 출발했다.
도착해보니 연휴는 연휴인지라 벌써 앞에 5팀이 대기 중이다. 손님들이 기다릴 수 있는 외부 정원이 꽤 멋지다. 예쁜 꽃도 피어있고, 귤밭도 있다. 6월 귤꽃이 필 때 오면 수국도 함께 볼 수 있겠다! 여름밤에 친구들과 함께 모여 앉아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책도 읽고, 커피도 마시며 해가 지면 같이 별도 보는 예쁜 그림이 그려지는 정원이라 탐이 난다. 이렇게 공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 차례가 되었다.
서광춘희는 감귤창고를 개조하여 식당으로 만든 곳이다. 주인 부부가 꽤 감각 넘치는 분들이신지 작품들도 많은데 심지어 화장실에도 이왈종 선생님 원작이 걸려있다. 곳곳에 고가구들은 우리로 하여금 가구 만드는 것을 배우고 싶다는 꿈을 꾸게 할 만큼 고고한 멋을 뽐내고 있다.
우리가 자리에 앉고 얼마 되지 않아 재료 소진으로 손님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요즘 윤식당을 보고 있으니 음식점 사장님 입장에서는 '재료 소진'만큼 자랑스럽고 뿌듯한 것이 없겠다 싶다. 바지락을 한솥이나 삶았는데 육수가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는 사장님의 자랑 섞인 푸념을 들으니 내 입에도 괜한 미소가 걸린다.
드디어 성게 라면이 등장했다.
조리를 끝낸 후 성게를 살포시 얹어 주시는데 익히기 전에 조금 떠서 입에 넣어본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바다향기! 잔뜩 검은 가시만 가지고 있는 성게는 누가 먹기 시작했을지 궁금하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이 맛을 몰랐을 테니!!
라면 생면과 바지락 육수, 적당히 데쳐진 숙주와 구운 반숙 계란, 그리고 건호박과 김까지!! 어느 것 하나 따로 놀지 않으면서 본연의 맛을 낸다. 특히 건호박 아이디어가 참 좋았는데 뜨거운 국수 안에서 흐물흐물해지는 호박보다 보기도 좋고 식감도 좋았다. 구운 것으로 추정되는 반숙 계란은 짭조름한 맛 때문에 오물오물 오래 씹어 먹고 싶어 진다.
성게를 반은 익히지 않은 채로 먹고 반은 익혀서 먹었다. 면 위에 성게를 얹으니 면이 코팅되어 맛이 더 좋다.
양 또한 꽤 많은 편이었는데 시원한 국물 맛에 기린 생맥주 한잔을 곁들이니 배가 뻥 터지겠다. 쌀국수가 아쉬운 비 오는 여름날 또 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