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났던 설국은 그랬다.
내가 자고 있는 밤사이 조용히 내려앉은 눈송이들이 세상을 하얗게 감싸 안고 나면 나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눈이 내린 다음날이면 창밖으로 보이는 눈 내린 풍경을 5분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소복소복 내리는 눈송이를 보면 마치 내 마음도 깨끗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집을 나서면 깨끗하고 포근하던 눈은 온데간데없고, 구정물로 만들어진 질척거리는 차가운 괴물체가 내 발에 붙어 있다. 지나가는 차가 뿌리는 괴물체를 맞을까 싶어 인도의 안쪽으로 붙어서 걷기도 하지만 그곳이라고 안전한 건 아니다. 건물에서는 마치 고장 난 냉동실에서 나온 성에 같은 눈이 뚝 뚝 떨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아침에 느꼈던 고요함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깨끗함은 어디로 사라지고, 더럽고 질척이는 차가운 괴물체들로 남겨진 걸까?
제주의 설국은 조금 다르다.
매서운 겨울의 바닷바람과 만난 눈송이들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미치광이를 닮아 있었다.
눈보라가 치는 날에는 잔머리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머리를 단정히 묶고, 바람 한점 내 품으로 파고들지 않도록 채비를 단단히 해야 했다.
파란 하늘이 쏘옥 나오면 아, 이제 날이 좀 풀리려나 싶은데 여지없이 하늘은 다시 어두워지고 화를 내기 시작한다. 이런 날씨가 벌써 3일째 계속되고 있다. 2년 전 제주를 떠날 때가 32년 만의 폭설이라고 했는데 이번 폭설은 2년 만의 폭설이란다. 일 년 중 기온이 영상인 날이 360일쯤 되는 서귀포에서 이런 날씨는 정말 드물다.
그런데 제주의 공기가 맑아서일까? 차에 쌓였던 눈이 녹아도 차가 더러워지지 않는다. 기온이 높은 편이어 선지 괴물체의 과정 없이 눈이 물로 변한다. 미치광이처럼 내려서 포근히 덮였던 눈들은 눈보라가 끝나고 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간다.
무엇이 더 나은지는 모르겠다.
시작이 좋은 것이 나은지,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 나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