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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구십칠 Feb 03. 2024

P의 OBEY

 바라지 않음으로써 간절히 바란다. P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흔히들 이야기한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간절히 바라라고. 그럼 우주의 기운이 너를 도와 간절히 바란 그것을 이루게 해준다는 자기 실현적 예언. 하지만 P는 오랜 경험으로 감각하고 있다. 꼭 그렇지는 않다고. 적어도 자신의 경우에는. P는 간절히 바라면 오히려 멀어진다고 믿고 있다.


오학년이 될 때까지 P는 공부라는 것에 대해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다. 수업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집중해서 받아적고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적어두었던 이야기들을 다시 곱씹어 자기 것으로 만든다. P에게는 의식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행해지는 루틴이었다. 그렇게 P는 반 1등을 놓치지 않아왔다.

균열은 늘 외부인으로부터 시작된다. 먼 도시에서 전학왔다던 유민은 첫 모의고사에서 P의 성적으로 가볍게 뛰어넘었다. 이것이 시골학교와 도시학교의 차이라는 듯이. 그때부터 P는 처음으로 공부라는 것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말씀 중 어느 말씀이 시험에 더 중요한 이야기인지, 언제 요약하고 얼마나 반복하는 것이 최적의 시험공부 방법인지, 유민은 평소에 어떤 식으로 평소에 공부하는지. P에게 생각없이 행해지던 루틴에 가까웠던 공부는 점점 전략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P는 졸업때까지 유민의 성적을 넘어서지 못했다. 넘어서기는 커녕, 여러 명의 상위권 중 한명 정도로 분류되었다.


대학교 4학년, 동기들이 취업을 위해 영어학원을 다니고, 봉사활동 점수를 쌓고, 기업의 산학협동 프로그램에 참여해 이력서를 한줄한줄을 성실하게 채워나가고 있을 때도 P는 유유자적이었다. 별 생각이 없었다고 하는 편이 더 맞겠다. 재미있다고 느껴서 시작한 공모전에 늘 낙방이었지만 운좋게 수상한 공모전을 통해 원하던 업계의 회사에 인턴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정직원으로 전환해준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계속해 인턴기간을 연장했다. 그냥 그곳에서 일하는 것이 좋아서. 친구들은 취업 가망없는 회사에서 빨리 탈출하라고 아우성이었지만 P는 별 생각없이 인턴생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성실함을 인정한 회사사람들의 적극적 지원으로 정직원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업계에서 연차가 쌓이자 어느 순간 P는 '인정'이라는 것을 바라기 시작했다. '열심히 갈고 닦아왔고 남들보다 잘하니까 좀 더 인정해줘'라는 욕구가 P의 가슴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더 잘해서 상사에게 인정받고 위로 올라가는 것은 모든 직장인의 기본 심리 아니던가. P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인정'을 강하게 원하기 시작하자 또다시 발걸음이 꼬이기 시작했다.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업무가 무엇인지 선별하고, 제대로 된 결과물을 내야한다는 압박에 시달리자 평소보다 부자연스러운 결과물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P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자신은 그런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간절히 원할 수록 원하는 것에서 멀어지는 종류의 사람. 오히려 원한다는 자각없이, 그냥 생각없이 움직였을 때 원하는 것에 가까워지는 역설적 인과관계의 인간이라는 것을. P는 더이상 간절해지지 않기로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주어진 일을 하고, 해야할 일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이것이 P의 뚜렷한 삶의 방식이 되었다.


그런 P는 종종 OBEY의 티셔츠를 입었다. 그리고 등에 큼지막하게 프린트된 'OBEY'라는 문구를 의식하며 마치 비밀작전을 공유하는 동지의 등을 맞댄 것처럼 '피식'하고 웃었다. OBEY를 탄생시킨 셰퍼드 페어리도 P와 같은 역설적 인간이 아닐까 생각했다.

스트릿 아티스트인 셰퍼트 페어리는 1980년대 말 부터 프로레슬러 '앙드레 더 자이언트'의 얼굴 일부분을 잘라 OBEY라는 문구와 함께 길거리 곳곳에 프린트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허가받지 못한 건물의 외벽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주로 심야에 낙서를 했지만 때때로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고 낙서를 해나갔다. 'OBEY, OBEY, OBEY...' 장난같았던 그의 작업은 그가 속해있던 스케이트보더 커뮤니티 사이에서 입소문을 모으다가 점차 전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OBEY는 직역하면 '시키는 대로 하다', '복종하다'이다. 셰퍼트 페어리는 반복되는 OBEY의 노출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이 무엇에 '순응하고 따르고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밝혔다. '복종하다'라고 반복적으로 말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복종하지 않게 만든다. P는 셰퍼트 페어리의 작업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P에게 뚜렷한 삶의 방식이 자리잡힌 이후에도 삶은 간절히 원하는 것을 끊이없이 탄생시켰다. 더 나은 환경, 더 많은 주목, 더 많은 인정. 하지만 P는 고개를 돌렸다. 쳐다보지 않고 머릿 속에 떠올리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했다. 그저 일하고 쓰고 살아갔다. 때때로 OBEY를 입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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