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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리어드 Oct 05. 2023

퇴직 후 우울증 극복하기

58년 개띠의 공부도전기 (5)

얼마 전 50대 후반에 퇴직한 고등학교 후배를 만났다. 직장을 다닐 때는 활력이 넘치던 친구인데 무기력해 보이고 웬지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이런저런 말끝에 요즘 식욕도 없고, 밤에 잠도 잘 안 오고, 만사가 귀찮아진다고 한다. 내가 우울증 증세가 아니냐고 말하자 후배는 펄쩍 뛰며 ‘우울증은 무슨 우울증.. 날씨가 더워져서 그렇죠’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아내와 자식들의 태도 변화에 불만을 털어놓았다. 퇴직한 후 자신을 마치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평생 가족을 위해 일했는데 이제와서 부담스런 존재로 본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후배와의 만남은 씁쓸한 마음으로 끝났다. 그의 마음이 전적으로 공감되었기 때문이다.    

      

후배의 경우는 퇴직 후 겪는 전형적인 은퇴증후군이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30년 동안 죽어라하고 가족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지금이야 주 52시간 근무,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이르는 말)을 주장하지만 우리 시대는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했다. 평일에는 아이들 얼굴 보기조차 힘들었고, 주말에도 쌓인 피로 푸느라 아이들과 제대로 놀아주지 못했다. 그렇게 30년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삶의 현장에서 밀려났다. 퇴직 후 초기에는 출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몸에 밴 습관 덕에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집안 구석구석을 배회한다. 30년 습관이 하루 아침에 바뀔리는 없다.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신세. 베란다 앞에서 도로 위를 지나가는 자동차나 이른 아침 출근하는 회사원들을 바라보면 세상은 바쁘게 돌아가는데 자신만 뒤에 쳐진 기분이 들어 한숨을 쉬는 시간이 늘어난다.     

      

가족에게도 아버지, 남편으로서의 존재감을 급격히 사라진다.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과거의 존경스러운 아빠, 멋진 남편에서 힘없고 무능력한 아빠, 늙은 남편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낀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말의 무게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든다. 공연히 죄를 진 것도 없는데 아내 보기가 불편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아내의 시선도 예전 같지 않고, 자식들도 대화를 거부하는 경우가 생긴다. 예전 같으면 별문제가 되지 않을 사소한 내용 가지고 싸우는 경우가 발생한다. 가족과 함께 있으면서도 마치 섬에 고립된 것 같은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이런 시간이 길어지면서 차츰 가장의 지위를 도전받게 돼 전반적으로 심리적 위축을 느끼는 일이 빈번해진다.          


이런 심리적 상태가 오래되면 우울증으로 발전한다. 우울증의 발생빈도는 가족 속에서의 역할 부재나 신체질환 등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평소와 달리 복통, 두통, 흉부통, 관절통 등 신체 여러 부분의 통증을 호소하는 일이 많다. 또한 식욕부진, 체중감소, 수면장애, 변비, 만성적인 피로 등을 동반하며, 매스꺼움, 구토, 위장의 불쾌감 등의 소화기 장애를 느끼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은 우울증이 진행될수록 인지왜곡 현상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주변의 모든 상황이 비관적이 되고 자기 자신을 자꾸 비난하게 되면서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서울시 북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하라연 과장은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은퇴를 앞두고 쉽게 우울해 하는 경향이 많은 이유는 기존에 사회생활 속에서 인정받고 존경받아왔던 생활을 한순간에 상실해 공허함에 빠지는 경우가 많아 우울증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 한다. 우울증은 가족들의 무관심 등으로 인해 제때 진단 및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평소 가족들의 각별한 관심으로 조기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전했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가족 앞에서는 강한 척 하지만 의외로 정서적으로 취약한 세대로 분류된다. 실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연령별·성별 우울증 진료 인원’을 조사한 결과 50대 우울증 남성 환자의 수는 전체 연령대에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증가 추세도 꾸준하다. 2014년 3만6,102명이던 50대 남성 우울증 환자 수는 지난해 3만9,463명으로 9.3% 증가했다. 지난 2007년(2만6,800명)과 비교하면 32%나 증가했다. 

           

정신과의사 호킨스는 인간 의식을 17단계로 구분했다. 최고의 의식은 사랑·평화·기쁨·깨달음이다. 최악의 의식은 수치심·죄의식·무기력·슬픔이다. 수치심은 죽지 못해 사는 수준이다. 자살 충동이나 잔인한 행동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죄의식은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든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고 자신과 타인에게 가혹하다. 수치심과 죄의식을 표현하면 정신과의사는 긴장하게 된다. 공격성이 자신을 향하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은퇴 후 우울증을 자가 진단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우선 △우울한 기분이 2주 이 상 지속된다. △ 일상생활이 재미없고 따분하다. △ 평소보다 체중이 많이 감소되거나 부쩍 증가했다. △ 수면장애를 느낀다. △피로감 및 활력 상실 △ 존재감이 없으며, 죄책감을 느낀다. △사고력 및 집중력이 떨어지고 안절부절 한다. △ 반복적인 자살 시도 및 죽음에 대한 반복적인 생각을 한다. 위 내용 중 5가지 이상 해당된다면 은퇴 후 우울증을 의심해야 하며, 전문의와 상담이 요구된다고 한다.    

      

은퇴 후 우울증 예방을 위해서는 전문가들은 평소 자원봉사, 종교생활, 취미생활, 규칙적인 운동 등을 통해 여가시간을 활용하는 것이 도움이 되며 우울증을 악화시킬 수 있는 음주와 흡연은 멀리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위와 같은 전문가의 조언 외에 ‘공부하기’를 권하고 싶다. 은퇴 후 우울증은 주로 정체성 혼란, 상실감, 소외감, 무력감에서 오기 때문에 공부는 이를 극복하게 해주는 좋은 치료제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게 해주는 공부, 인문학 공부는 삶의 중심을 잡아주어 흔들리지 않게 해준다. 철학자 니체는 “삶의 의미를 가진 자는 어떤 환경도 극복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한 인문학 공부는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키워준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고삐풀린 욕망 때문이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본질을 파악할 때야 비로소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프랑스 문학평론가 르네 지라르는 '욕망의 삼각형'이론을 통해 ‘우리의 욕망은 자신의 욕망을 쫓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타인의 욕망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찾아 떠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인문학 공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부는 소외감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 은퇴 후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갑작스런 단절감이다. 남자의 경우 은퇴하면 관계의 80%가 사라진다고 한다. 세상에 혼자 뚝 떨어진 느낌을 받는다. 현대인은 유난히 고독을 두려워한다. 특히 인터넷, 페이스북, 카카오톡과 같은 소셜네트워크, 모바일이 일상화 되어 있는 초연결사회(hyper-connected society)에서는 휴대 전화나 인터넷,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다른 사람과 쉴 새 없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고독을 느끼지 않으려 몸부림친다. 반면 공부는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마치는 순간까지 혼자서 몰입하는 고독한 작업이다. 사람 때문에 느끼는 것이 아닌, ‘온전한 고독’이라고 할까. 공부에 몰입하는 동안은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배움이 주는 즐거움에 빠지게 된다. 공부하는 삶을 살게 되면 나만의 공부에 빠져들 수 있는 조용한 시간이 반갑게 느껴진다. 퇴직 후 단절감으로 불안한 마음은 공부를 하는 과정을 통해 사라진다. 나 역시 퇴직 후 박사과정을 시작함으로써 고립감, 소외감을 극복할 수 있었다. 아마 퇴직 후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심각한 소외감으로 우울증에 빠졌을지 모른다.    

      

또한 공부는 무력감을 물리쳐 준다. 매일 매일 뭔가 새로운 것을 배웠다는 충만감, 정체되어 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성취감은 은퇴 후 찾아오기 쉬운 무력감을 물리친다. 무엇보다도 “이 사회에서 쓸모없는 사람이 되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움도 사라진다.     

     

공부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대학 졸업 후 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데 가능할까 하는 걱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상에 앉아 책을 펴는 순간 공부는 시작된다. 만약 책 첫 장을 넘겼다면 당신은 이미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공부가 인도하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그 곳에는 배움의 기쁨, 깨달음, 지혜, 환희가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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