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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누 Feb 16. 2022

4년 후가 기대되는, <반도>

2022년 2월 15일 화요일의 의외성

2020년 박스오피스 3위에 오른 영화는 바로바로 연상호 감독의 <반도>. 반도는 2020년 7월 15일 개봉하며 약 381만 명 관객 수를 모아 박스오피스 3위로 스코어를 마감한다. 2019년 6월쯤 촬영을 시작했고 2019년 말부터 2020년 초부터 급격히 코로나 문제가 심각해짐에 따라, 개봉 시기를 많이 고민했다고 한다. 특이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배급사 측에서 손익분기점을 250만 명으로 잡아 흥행했다고 보는 것 같다. 

2020년 개봉한 <부산행>은 천만 관객을 넘고 해외에서도 주목받으며 별안간 한국을 '좀비 강국'으로 만들어 놓는 계기가 된 작품이었다. 이후 줄줄이 좀비 관련된 콘텐츠가 나와 계속 주목을 받은 것을 보면 우리나라가 특히 좀비 콘텐츠를 잘 만드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글이 될 것 같다.

......, 만.

나는 좀비 콘텐츠를 선호하지 않는다. 이유를 꼽자면 글쎄, '좀비'라는 게 매력이 없다. 특별히 엄청 무서운 것도 아니고, 느리고, 밤이 되면 눈이 안 보여서 청각에 집중하고, 물어서 병균을 옮기고. 전 세계적으로 대히트를 쳤던 <워킹 데드>도 몇 화 보다가 그만뒀던 걸 생각하면 좀비로 인한 아포칼립스물이 그다지 내게 대단한 울림을 주지 않는 듯하다.

내가 연상호 감독의 <반도>를 보지 않았던 건 좀비물에 대한 선호가 낮아서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부산행>이 정말 별로였기 때문이다. 갇힌 부산행 열차에서 좀비와 싸운다는 설정은 충분히 새롭기는 했지만, 그 설정 자체 외에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든 생각은 '2016년에 이런 신파 대체 뭐야?' 정도였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하지만 특히 극 후반부에 주인공이었던 석우(공유)가 별안간 부성애를 깨닫는 장면에서 피가 차갑게 식었다.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에서 나오는 킹스크로스 스테이션도 아니고. 인물 하나하나에 이입도 어려웠고 배우들의 감정선이 느껴지지 않았다. <반도>는 <부산행> 이후 4년, 버려진 반도의 이야기다. 당연히 좀비물인 줄 알았다. 그래서 안 봤다. 개봉 이후 2년, 이제야 깐 <반도>는 어땠냐고?

놀랍게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사실 생각보다 재미있게 봤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이 리뷰에는 <반도>의 스포일러가 완전! 포함되어 있습니다. ~


1. 좀비물이 아닌 포스트 아포칼립스물

<반도>는 좀비물이 아니다. <부산행> 이후, 버려진 반도의 이야기다. <부산행>은 좀비 바이러스가 마구 퍼져 안전한 줄 알았던 '부산'마저 뚫리는 이야기다. 서울에서 출발한 '부산행' 기차에도 좀비가 타고 있어서 생긴 기차 좀비물이다. <부산행>의 인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좀비와 싸우느라 바쁘다. 그렇지만 <반도>에서 좀비는 거들뿐. <반도>는 좀비 바이러스로 인해 대피할 사람들은 모두 국외로 피난을 떠난 뒤 4년, 아무도 살아남지 않았을 것 같았던 반도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정석(강동원 분)은 4년 전, 누나의 가족들과 피난선에 오르지만 누나와 조카를 잃고 만다. 홍콩에서 하루하루를 낭비하던 정석은 어느 날, 반도에 들어가 달러가 든 트럭을 홍콩으로 반입해 달라는 조직의 제안을 받는다. 원치 않았지만 철민(김도윤 분)에게 일말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정석은 철민과 함께 버려진 땅, 반도로 입국한다. 이 트럭을 되찾는 과정에서 정석은 아직 이 땅에 남아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민정(이정현 분)과 그의 딸 준이, 유진 그리고 김 노인을 만난다. 여기는 민정의 가족들만 살아남은 게 아니라, 631부대라고 하는 군인들이 살아남아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을 제외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들개'라고 칭하며, 그들을 잡아와 좀비들과 사투를 벌이도록 한다. 이것을 보고 웃고 즐기는 것만이 낙인 631부대에게 트럭과 위성전화를 빼앗기는 바람에 민정과 정석은 이 자들에게서 트럭을 빼앗아야 한다.

자, 보라. 이 이야기에서 좀비는 그저 이 이야기의 설정에 불과하다. 이미 4년 동안 이 반도에 남겨진 사람들은 좀비를 어떻게 물리쳐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해가 뜨는 낮에는 움직이지 않고 해가 진 밤에만 움직인다. 다들 총기를 소지하고 있고 운전을 미친듯이 잘한다. 특히 준이의 운전 실력은 보는 내내 짜릿할 정도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1종 면허가 필수군.......'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에서는 더 이상 좀비와 인간이 싸우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든 인간이 인간과 싸운다.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이미 많은 사람이 느꼈겠지만,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것은 사람이다. 바이러스가 창궐한 시대에도 빈부 격차는 극심해졌으며 돈이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수월하게 이 시대를 견딘다. 코로나 블루를 넘어 코로나 레드로 향하는 시대. 사람은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한다. 약자를 향한 폭력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뉴스에 오르는 시대......, 언제나 인간의 적은 인간이었다. 이 지구를 오염시키는 것도 바이러스를 만드는 것도. 그러니 <반도>가 인간 대 좀비를 다루는 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을 다루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좋은 이야기는 본래 이와 같이 진화하는 법이다. <배트맨 다크 나이트>가 좋은 히어로물인 것은 단순히 배트맨 대 조커와 같은 선악의 구조가 아닌 '무엇이 진짜 악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어벤저스> 시리즈가 단순히 히어로 대 외계인 구조를 넘어서서 자신들 내부에서 무엇이 진짜 '정의'인가? 를 놓고 고민하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부터 영화가 더욱 풍부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좀비와 사람을 놓고 경쟁을 붙이는 사람을 보다 보면, 바이러스가 정말 악한 것인지 사람이 악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좀비물을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아쉬운 영화겠지만, 내게 <부산행>보다 <반도>가 좋은 영화인 이유는 명확하다. 영화가 '사람 대 사람'의 싸움을 그리기 때문이다. 물론 아쉽게도 631부대는 너무 밋밋하게 그려진다. 이 영화로 또 한번 구교환 붐을 일으킨 서 대위와 황 중사(김민재 분)를 제외하곤 통째로 악으로 치부해도 무관한 정도다. 인간이 아포칼립스 시대를 지나면 얼마나 짐승만도 못한 존재가 되느냐를 보여 준 데 그 의의가 있다 하겠다.


2. 여성 캐릭터의 재발견

나는 연상호 감독이 만드는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에 기대할 일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의 비판을 의식한 탓인지(유의미한 비판이 그에게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나는 연상호 감독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 아니면 훌륭한 팀원이 생긴 탓인지 <반도>에서 보여 준 여성 캐릭터의 발견이 눈부시다. 나는 이 영화에서 얼굴을 처음 본 준이(이레 분) 배우의 자동차 씬은 가히 <매드 맥스>와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역시 차를 사려면 SUV로 사야 한다고 믿을 만큼 준이의 자동차는 튼튼하고 그의 운전은 화려하다. 이거 장르가 좀비물이 아니라 <분노의 질주>였나? 하고 착각하게 할 만큼 영화에서는 많은 자동차 추격씬이 등장한다. 처음 준이 등장해 정석을 구해 주는 부분에서 사이드 미러를 접고 골목길을 질주하는 장면은 한국인이라면 짜릿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631부대와 정면 승부 장면도 사실 좀비들은 이용당할 뿐 자동차 레이스에 가깝다. 이거 사실 장르가 <주먹왕 랄프>? 라고 의심할 정도로 쾌감 있는 질주는 꽤 긴장되고 초반의 떡밥을 회수해 가며 정점에 달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 영화에서 주로 운전대를 잡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이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이다. 초반에 죽어 버리지만 맨 처음 정석이 트럭을 탈취하러 왔을 때 운전대를 잡았던 것도 택시를 운전했던 여성이고 달러가 든 트럭을 추적을 피해 모는 것은 민정이다. 내내 칭찬했던 준이는 다시 말해 무엇하랴.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에서는 그놈의 김여사 소리 좀 안 들을 수 있는 건가. 여자들이여, 1종 면허를 따라! 안 되면 빨리 2종이라도 따라!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를 대비하자. 물론 여전히 대사를 쓰는 감각은 좀 떨어지는 듯해, 아역의 대사로도 꽤 많은 비판을 받은 듯하다만, 사실 <부산행>에 비하면 어디까지나 양호하다고 본다. 대체 왜 <반도>가 신파라고 야단들이지? 내가 볼 땐 없는 부성애를 쥐어짰던 <부산행>이 신파 그 자체였다.

<반도>에서 김 노인이 내내 우리를 구하러 올 거라고 한 제인 소령은 제3세계 여성이었다. 희생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던 어머니 캐릭터인 민정은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 세계로 뛰어나간다. 이렇게 연상호 감독이 이 지옥 같은 <반도>에서 미래를 위해 살려 주는 것은 세 여성과 정석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계속 '누군가를 구해야 한다'는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정석이다. 이 지점도 재미있다. 어떤 생각으로 감독이 연출했는지 몰라도 내게는 이 부분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감독의 이다음 작품인 <지옥>을 봐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게 만든다. 더불어 사실 포스트 아포칼립스라고 하면 흔히 전시 상황의 영화들이 그렇듯 어떻게 잔인하게 여성들을 다룰까 하는 걱정이 있었던 내게, 이 영화는 그런 지점 없이도 충분히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를 그려내어 더 높게 평가하고 싶다. 정말이지, 다시 봤습니다!!


3. 시원하고 깔끔한 액션

생각보다 재미있게 봤던 것은 액션 씬이다. 강동원이 등장하면 모든 걸 해결해낼 것 같은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액션 씬은 생각보다 끈질기게 정석의 목숨을 위협한다. 정석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남는 게 아니라 모두들 서로의 힘을 합쳐 좀비를 뚫고 631부대를 뚫는다. 강동원이 홀로 631부대로 들어가 철민을 구하기 위해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은 쫄깃하고 그 자체로도 특별한 재미다. 631부대가 진지를 치고 있는 것이 백화점이나 대형 쇼핑몰 같은 공간인 것을 이 액션씬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망해 버린 쇼핑몰을 그들은 로마 시대의 콜로세움처럼 사용하고 있고 총격전을 벌이는 인물들의 뒤로는 망해 버린 카페베네, 커피빈과 같은 익숙한 로고들이 눈에 띈다. 그야말로 '한국형' 영화다. 이런 영화들이 세계적으로 잘되는 게 좋다. 더 이상 '외국과 같은 풍경'만을 보여 줄 필요가 없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되는 시대가 정말로 오고 말았다. <킹덤>이나 <지금 우리 학교는>과 같은 드라마가 잘되는 것도 같은 맥락인 듯하다. 


연상호 감독의 영화를 전부 보지는 않았지만 늘 인물들의 감정선이 부족하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다. 다들 개개인의 서사가 있지만 이 점이 영화를 보는 관객을 설득하기에는 단편적이고 층위가 깊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행> 이후 4년 지나 제작된 <반도>는 많은 변화를 담고 있다. 그런 감독의 변화와 사유의 깊이를 지지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지옥>을 볼까 싶다. 앞으로도 더 많은 고민을 담아 언젠가는 신파가 아닌, 정말로 관객을 울리는 감독의 작품을 보고 싶다. 감독의 4년 후를 다시 한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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