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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누 Sep 30. 2022

#01. 언니들의 사랑이 귀한데

비누가 재하, 유나에게 | 그리고 재하와 유나로부터

#1. 내가 이상한 거야? 언니들의 사랑이 귀한데

언니들, 안녕?

폭탄 돌리기를 하듯 누가 먼저 쓸래? 를 이어가는 게 영 수상해서 내가 쓴다.

오늘 써야 적어도 99일 동안은 했다고 말할 수 있잖아.

그러고 보면 매일 쓸 것도 아니면서 무리해서 쓴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일하고 있거든.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이런 재미가 있지.

본업을 하는 와중에 몰래 슬쩍하는 그런 것 말이야.

시험 기간 동안 방을 치운다거나 소설이나 웹툰을 읽는 짓 따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나는 오늘 몸이 엄청 무거워서 어제의 숙취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정혈을 시작했어.

진통제를 털어 넣고 물을 마시며 엄청난 졸음과 싸우는 중이다.

언니들은 뭐 하고 있어?

이름을 불러 주고 싶지만,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지 몰라 우선은 언니들이라고 불러 본다.


언니들.

나는 어릴 때 언니들한테 예쁨을 참 못 받았어.

내가 동생이었던 경험이 없어 언니들한테도 아는 척을 해서 그랬는지,

그깟 나이 몇 살 많은 것 가지고 언니 노릇하는 게 웃겨서 그랬는지,

(초등학교 고학년의 똥폼 알지?)

나는 언니들을 막 언니 대접해 본 적이 없거든.

나이가 들어서야 왜 그랬는지를 막연하게 짐작해 봤지만 사실 잘 모르겠어.

늘 궁금했거든.

왜 언니들은 나를 싫어할까?

다른 애들은 다 귀여워해 주던데.

내가 이상한 거야?

나만 동생의 맛이 없는 건가?

그런 생각을 했었지.


그런데 스무 살이 되고,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동아리에 들어가고 학교에서 다른 학부 친구들을 만나면서

어느 순간부터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언니들이 나를 예뻐해 주더라고.

나는 그 언니들을 언니라고 부르기보다……, 이름으로 불렀는데도.

언니 대접도 안 했어.

존댓말도 안 했고 귀여운 짓도 안 했어.

그래도 언니들은 나를 친구로 대해 주었고 나를 사랑해 줬어.


‘언니들한테 사랑받는 기분은 이렇게나 대단한 거구나.’


그때 알았지.

살면서 언니가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하고 값진지.

언니들이 나보다 몇 해 더 살면서 얻은 것들, 느낀 것들을 나누어 주고

그 길에 대해 조언해 준다는 게,

그리고 그 길을 먼저 걷고 있다는 게 얼마나 믿음직스럽고 고맙던지.

언니들을 비롯해 정말 많은 언니들을 만나고 내 삶은 그 전과는 더없이 달라진 것 같아.

그러고 보면 내가 언니들에게 사랑받지 못해 의아하던 날들은 전부 지금을 위한 거였는지도 모르겠어.

나는 항상 언니들을 좋아했을 거야.

지금 언니들을 좋아하듯이.


이제 다시 일하러 가야 할 것 같아.

이효리가 엄정화에게 언니는 언니가 없이 어떻게 견뎠냐고 물었던 장면을 다들 알지.

나도 아마 언니들이 없었으면 못 견뎠을 순간이 있었던 것 같아.

아마 그게 올해였는지도 모르지.

언니들에게도 언니들이 있겠지?

그 언니들에게 오늘 사랑한다고 연락해 봐.

그 언니들이 언니들한테 준 사랑 덕분에 나도 오늘 사랑받는 것 같거든.

언니들의 내리사랑은 정말 짜릿해!

나도 언니들처럼 누군가에게 좋은 언니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가봐야겠다.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말고!

꼭 답장해 줘.

답이 없는 편지는 외로워.

나는 언니들이 나를 외롭게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아니까.


사랑을 담아,

비누

2022. 9. 24. 오후 10:13




Re: 네 사랑을 다른 언니에게 줬으면 해

제목부터 못돼먹은 것 좀 봐.

다이나믹듀오와 빅뱅 그리고 에픽하이를

마구 먹고 듣고 맛보고 즐긴 

격동의 k-힙합 주니어라서 그럴까? 


나는 가을 억새 같은 편지에도 

핸들이 고장 난 에이톤트럭처럼 들이받으며 답장을 해.


안녕, 내 동생 비누. 

처음 이 메일을 받고 사실 가슴이 차가워졌어


3년 먼저 탯줄 끊은 게 뭐라고, 내가 이런 사랑을 받아?


이효리에게 엄정화는 무대 위의 여자가 얼마나 빛나는지

본인이 빛이 되어 방향을 알려준, 북극성 같은 언니잖아. 

비누의 수많은 언니가 반짝임으로 길을 비춰준 것처럼-


그에 비하면 최유나는 제대로 된 길은 알면서도, 

한 눈 팔고 옆길로 새서! 진흙탕에 누워서! 

개구리 왕눈이처럼 누워서 목청껏 울고만 있는걸.

"비누야 어딨니? (삘릴리) 나 어디로 가면 되니?(개굴개굴)"


예전에 아이유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봤어

『Q. 지금의 아이유가 그 무렵의 아이유에게 한마디 해줄 수 있다면, 뭐라고 할까? 

A. 걔가 나보다 언니라 감히 해줄 말이 없다. 걔 덕에 내가 지금 잘 살고 있거든. 그냥 난 이제 어떻게 사는 게 좋겠냐고 물어보고 싶다.』


아 그래. 

빨리 태어남이 아닌 먼저 걸어간 언니 중

‘어린 나’가 있었구나. 


그래서 자격 없는 내가 받은 '언니 몫'의 사랑을 

감히 다른 언니에게 주려고 해. 


그 언니는 바로, 지난날의 곽비누.


넘치는 재능으로 주체 못 하고

온몸에서 삐져나오는 감각을 글로 풀던 비누.


사람에 받은 상처를 끌어안고 

다시 사람에게 사랑을 꺼내놓던 비누.


타지 골목들을 헤매던 걸음으로

서울 생활 곳곳에서 낯섦을 맞서는,

아 너무 아름다운 비누.


웅덩이에 누워서 덕질이나 하는 언니도 눈치가 있지.


“어린 비누님! 비누한테 받은 사랑 잘 닦아서,

저의 덕질존 제일 위칸에 고이 모셔뒀어요!

제가 택배비 부담하겠습니다. 주소 불러주세요~”


가끔 비누가 지난날들을 축축하게 이야기할 때마다 

비누야, 어린 비누를 사랑해줘-

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었는데

(너무 느끼해서 차마 말도 못 꺼내다가...)

이 답장을 빌려서 이렇게 이야기해.


오늘도 비누의 어린 언니를 가장 크게 사랑해줘!


이미 너의 존재만으로도 

먼저 태어난 언니들은 사랑을 빚지고 있으니, 


비누에게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며

-유나가

2022. 9. 29. 오후 8:15




Re: 나도 이젠 언니가 참 좋아

안녕, 비누 

짧은 답장 몇 줄을 쓸 거면서 결국 또 이렇게 늦은 답장을 보내. 

어제 새벽엔 꼭 보내고 팠는데.

망할 정혈을 시작해버렸고, 통증이 너무 심해 그냥 자버렸어.

정혈을 시작하며 보낸 편지에 정혈을 시작하며 답장을 하네. 

진정 피의 연대기다. (살짝 가슴이 뜨거워진 것 숨기지 않을게.)


가끔은 여러 번의 기회가 있다는 게 나를 더 주저하게 만드는 것 같아.

언제든 백스페이스를 누르고 다시 쓸 수 있어서 

계속 썼다 지웠다만 반복하고 있다. 

너를 생각하며 산 엽서에 가장 좋아하는 펜으로 편지를 쓸 때는

다시 쓰는 것이 애초 불가능하기에

앞만 보며 편지를 써내려 갔는데 말야.

지금껏 직선으로 뻗어 온 내 마음들이 네게 잘 가 닿았을 거라 믿으며 그냥 써 본다.


비누가 편지 이곳저곳에서 언니를 부르는 덕에 읽는 내내 나는 행복했어.

내게 와르르 사랑을 쏟아 주고는

그 사랑을 다시 나의 언니에게 전해보란 너의 끝 인사를 읽으며 

비누의 사랑은 참 끝이 없구나, 멈춰있지 않구나 생각했어.


비누야 

나도 언니를 무척 좋아해. 그래서 이 참에 사랑을 전해야지 했어.

그래서 언니들을 헤아려보는데

왜 자꾸만 비누 얼굴만 떠오르는지.

왜 자꾸만 "언니"를 부르는 목소리들과 얼굴들만 다가오는지.

분명 나도 좋아하는 언니가 있을 텐데.


한참을 서성이다 존재를 찾지 못해 외로워질 참에 깨달았지.

내가 사랑하는 언니는 

'너의 언니'구나. 


비누야 너도 알다시피 나는 종갓집 첫째 딸로 태어났어.

엄마가 둘째 딸이긴 했지만 이모는 자식보다 조카가 먼저 생겼고.

엄마, 아빠가 결혼을 일찍 한 편도 아닌데 

어릴 때 엄마, 아빠를 따라 모임에 가면 늘 애들이 없었어.


어디에서나 적어도 인생의 초반 3년은 어른들의 온갖 사랑을 독차지한 것 같아.

그 짧은 3년의 독사랑이 내게 어떤 책임을 독박 씌울지는 몰랐지.


내가 어느 정도의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 구실을 할 때쯤 

이곳저곳에서 우후죽순으로 동생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어.

어딜 가든 나만 애였는데, 어딜 가든 나는 언니이자 누나가 된 것이지.


그땐 몰랐는데 그게 내게 좀 부담이었나 봐.

어른들이 "엄마 아빠가 없을 땐 재하 언니(누나)가 대장이야. 그러니까 언니(누나) 말 잘 들어야 해."

라고 하면 나는 신이 나기 보단 무서웠고 힘들었어. 

나는 대장 놀이에 취미가 없었고. 

어떤 말을 해야 나중에 어른들한테 혼나지 않을지 알 수가 없었거든.


재하 언니(누나) 손 꼭 잡고 가면 된다고 다독이며

내 양손에 동생들의 작은 손을 쥐어줄 때면

누가 내 손도 좀 잡아줬음 좋겠다고 생각했어. 

자꾸만 빠져나가려 하는 조그마한 손들을 있는 힘껏 쥐어대느라

손바닥은 뜨거웠지만 손등이 너무 시렸거든.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앞서 태어나 자꾸만 누군가보다 먼저 산다는 것이 

억울했고 서러웠어. 


그런데 말이야 비누야.

나는 이제 언니가 참 좋다. 언니 없이는 못 살만큼 언니가 좋아.

정확히 말하면 내가 '너의 언니'라 참 좋아.

그게 나로 살아가도 괜찮게 해.


비누야

너를 만나고 나는 언니로 산다는 게 그렇게 짐이 되고 힘든 것이 아니란 걸 알았어.

언니로 산다는 건 고작 두어해 먼저 길을 걸었단 사실만으로도 

그 길을 어떻게 걸었든 칭찬받을 수 있는 것이란 걸 알았어.


언니는 다 잘해야 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제멋대로 언니라 불렀다 재하야 불렀다 하며

내 엉덩이를 놀리고, 내가 미워하는 내 모습들을 귀여워하고

앞에서 나를 챙기고 뒤에서 다독이는 네 덕에

언니란 건 내 생각과는 다르단 걸 알았어.

과거의 나를 붙잡았던 재하언니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어.


동아리 뒤풀이 때

각자 신나게 술을 마시다 진탕 취해 화장실에서 만나면 

별안간 나를 안고 눈물을 터뜨리는 네게 안겨서

나는 그냥 내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단 걸 배웠어.

정말 언니가 된다는 건 참 놀랍고 행복한 것이야. 


짧게 쓰려했는데 또 너무 길어져버렸네.

카페에서 마무리 지으려고 했는데,  

운동하는 곳까지 끌고 와 버렸어,

이제 운동하러 가야겠다.


비누야

내 과거에 후회가 없을 수 있는 것은

내 미래에 두려움이 줄어들 수 있는 것은

내가 너의 언니일 수 있기 때문이야.


사랑으로 재하가.

2022. 9. 30. 오후 12:32




비누, 재하, 유나 세 사람이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우리가 정말 이상한 건지 모르겠어요.


비누

최근에는 영화를 만듭니다. 여자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venukwak)


재하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쩌라고 (@brimmingoceanofmulbineul)


유나

엉망장자 (@___ll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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